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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 이타주의자] 피터싱어 / 21세기북스 : 선(善)의 최대화, 당신은 누구를 위해 기부를 하고 있는가? #책후기


선(善)의 최대화, 당신은 누구를 위해 기부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착한 일 좋은 일 선행을 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필요하며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으로 배워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손 쉽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돈을 #기부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부터 고등학교까지 기부를 통해 배운다는 의미로 다들 한번쯤은 저금통에 동전을 모아 기부금을 모으거나 학급별로 개도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후원을 하는 방식으로 기부를 해봤으리라 생각한다. 그 행위의 동기가 무엇인지 보다도 그 행위를 함으로써 어떠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배운적이 없는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자선단체 에 매달 얼마씩을 돈을 보냄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것은 연말의 약간의 소득공제 혹은 내가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뿌듯한 마음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이타주의 적 행위를 했음에도 이것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되었고 내가 원하는대로 그 돈이 쓰여졌는지 관심을 가져본 사람은 많이 없다. 우리 사회가 교육을 해오고 주위에 선전을 해온 방식 자체가 단순히 기부한다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기 떄문일 것이다. #개발협력 #개발도상국 #국제빈곤 이러한 문제를 다룰 때마다 #시민사회 #ngo 단체에서 혹은 #국제기구 #유니세프 같은 곳에서 모금 영상을 볼때 면 우리는 그 지역과 나라의 가장 최악의 상황만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 #꽃으로도때리지말라 는 책을 읽으며 느꼈던 안타까움, 연민 그리고 이를 방치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같은 복합적인 감정으로 아 내가 이런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와 동일하다. #효율적이타주의자 #피터싱어 이 책은 우리가 하는 기부행위가 과연 선의 최대화에 알맞는지, 누군가 하고 있는 기부가 효율적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사람들은 이런 기부와 모금과 같은 좋은 일에 효율성을 따지는 것 얼마만큼 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피터싱어가 던지는 질문은 일상적인 우리의 상식에서는 다소 불편하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그 필요성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는 인식을 뒤 엎어 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냉철하게 우리의 기부가 그 의미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한다.

 

 

개발협력사업에 대해 공부하면서 #개발효용성 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에 얼마만큼의 재원이 투자되고 목표에 얼마나 달성을 했는가를 지표를 통해 성과관리를 하는 것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익히고 있다. 감성적 이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감성적 이타주의가 우선 되지 않으면 효율적 이타주의자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다.

 

나는 스스로를 모순되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곤 했는데, 누군가를 도우고 싶으면서도 나 또한 개인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함을 누렸으면 좋겠고, 누군가와 함께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으면서도 개인주의자로써 효율적으로 일을 스스로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내 주위의 사람들, 개발협력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사실 어떤 식으로도 비판 받을 수 없지만, 효율적 이타주의자 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한 대목에서 내가 자선단체에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따른 고소득의 일자리를 얻어서 그 소득을 효율적으로 사업을 완료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훨씬 선의 최대화라는 면에서는 낫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나의 진로를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이 책에서 읽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자식이 돈을 많이 벌었으면 하는 부모님의 단순하 소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국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자선단체들이 있고 국제기구들이 있고 단순히 인권과 관련된 인도주의 목적뿐만 아니라 환경, 동물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의 선한 기부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에 대한 기부에 대해 가장 비효율적인 기부라고 생각하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은 사실 선의 최대화, 더 나은 세상이라는 목적 보다는 듣기 좋은 달콤한 설탕 같은 수준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본인의 기부가 정말로 필요한 곳에 가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가.

 

 

사람들은 세상이 갈수록 부정적이고 안좋은 쪽으로 흘러간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인도주의적 활동이나 자연보호, 동물해방 등과 같은 문제에 회의감을 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이 다루는 자극적인 소재에 불과하다. 국제적인 보고서를 살펴보면 갈수록 기아와 빈곤 비율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고, 개도국을 비롯한 각 지역의 재난적인 상황, 보건의료와 같은 건강적인 측면에서도 우리의 기부가 어떤 식으로 활용되고 효과를 보고 있는지 확인 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알려주지않는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이 책은 감성적 이타주의자를 비난 하거나 기부하는 행위 자체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원하던 선이 어떻게 하면 낭비되지 않고 효율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본인의 선한 영향력을 최대화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도록, 나도 나의 행위가 단순히 좋다 착하다를 벗어나 실질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고 어떤 기관이 이를 함께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해야겠다.

 

 


[효율적 이타주의자] 피터싱어 / 21세기북스

: 선(善)의 최대화, 당신은 누구를 위해 기부를 하고 있는가?

#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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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이유] 노암촘스키가 알려주는 불평등 전략 10가지


누가 어떻게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는가? 질문에 대한 답

 

 

#노암촘스키 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학자다. 정확하게 그의 어떤 책을 시작으로 그의 글을 반가워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고등학생 때 그의 책을 읽으면서 #강대국 의 #패권주의 에 대해 알게되었고,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 언론에서 포장하는 권력의 실체, 정의에 대한 진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줬다는 점이다. 전자도서관에 신작도서를 보면서 그의 이름을 본 순간 난 마치 오래 좋아했던 가수의 컴백소식을 들은 것처럼 바로 책을 대출했다. #불평등의이유 라는 책 제목은 사실 #불평등 과 관련된 수업과 책을 읽어오면서 어느 정도 짐작되는 내용이 있기 했지만, 촘스키가 어떠한 시선으로 불평등에 접근했는지 알고싶었다.

 

 

 촘스키가 쓴 책을 읽고 내가 블로그에 남겼던 글들을 보니 새삼 나의 취향도 대나무 같다. 20살때 썼던 글들이 26살의 내가 보기에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 당시는 #권력 자체에 대해 내가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면 지금은 그 권력의 형성 원인과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축적되고 있는 문제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좀 더 고민하게 됐다는 차이가 있다. 불평등의 이유는 #미국 사회 내의 불평등을 예로 들고 있지만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다. 아래는 단순히 어느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목차이지만, 불평등의 원리 10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핵심 요약본이다.

 

 


 

원리 1 민주주의를 축소하라.20

부유한 소수.20 | 귀족과 민주주의자.23 | 불평등을 축소하라.24 | 미국 사회가 저지른 죄.26 | 상쇄하는 경향들.27

 

원리 2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라.38

민주주의의 과잉.39 | 교육과 교의 주입.41 | 비판자들에 대한 비난.43 | 국익.45

 

원리 3 경제를 개조하라.56

금융기관의 역할.57 | 금융화.58 | 해외 이전.61 | 노동자 불안정성.64 | 대항 세력.66

 

원리 4 부담을 전가하라.76

금권경제와 프레카리아트.77 | 부자 감세.80 |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84

 

원리 5 연대를 공격하라.94

공교육에 대한 공격.96 | 민영화.98 |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101 | 다시 연대를 향하여.104

 

원리 6 규제자를 관리하라.110

글래스-스티걸 법.111 | 회전문.112 | 로비.113 | 탈규제와 금융 붕괴.114 | 너무 덩치가 커서 감옥에 넣지 못한다.115 |보모국가.116 | 외부 효과와 시스템 리스크.118 | 시장이 지배하게 하라.120

 

 

원리 7 선거를 주물러라.132

법인 기업의 인격.133 | 기업이 후원하는 선거.134 | 투표함을 넘어서.136

 

원리 8 하층민을 통제하라.144

뉴딜 정책.146 | 기업계의 공세.148 | 새로운 시대정신.151 | 계급의식.154

 

원리 9 동의를 조작하라.164

홍보 산업의 부상.165 | 소비자를 조작하라.166 | 비합리적 선택.168 | 선거의 기반을 무너뜨려라.170 | 후보자를 선전하라.171

 

원리 10 국민을 주변화하라.182

초점이 맞지 않는 분노.184 | 인류의 생존.187 | 권위 구조는 자기정당화를 하지 않는다.191 | 변화.193


 

기득권은 #선전 #프로파간다 #이데올로기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이런 용어들이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만연해 있고 그것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이 책에서 볼 수 있었다. #정치외교학 #사회학 을 복수전공했던 나에게 촘스키는 그야말로 내가 매달리고 싶은 지도교수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의 글은 나의 시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불평등에 관련돈 책들을 여러번 읽어봤지만 이 책은 불평등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누구에 의해 형성되고 이용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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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자유로운 빈민이 최고 권력을 잡을 때는 민주정이고, 소수의 부유한 귀족의 수중에 최고 권력이 있을 때는 과두정이다.

 

▶단기 수익을 버는 방향으로 사업 행태를 설계하고, 그렇게 해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면 사업이야 망하든 말든 손 털고 떠나면 된다.

 

▶한편 많은 보수를 받는 전문직은 보호를 받는다. 그들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 경쟁하지 않는다.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자본은 자유롭게 이동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노동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지만 자본은 가능하다

 

▶1980년대 중반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부유층에 부를 몰아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고통을 전가한 정책을 추진한 이래로 금권경제가 자리를 잡았다.

 

 

▶최고 부유층이 내는 세금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나머지 국민들의 세금 부담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조세 체계가 재설계되었다. 이제 임금과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소비에만 세금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를테면 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배당금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는 쪽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투자를 늘리고 싶다면, 가난한 이들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된다. 그들은 값비싼 요트나 카리브 해의 휴양지가 아니라 물건을 사는 데 소득을 지출한다. 생활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지출이 생산을 자극하고, 투자를 자극하며, 고용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상위 부유층에게는 사회보장이 전혀 필요 없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일사불란하게 벌어진다. 한 가지 방법은 사회보장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다. 어떤 제도를 없애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선 예산을 삭감하라. 그러면 그 제도가 작동하지 않을 테니. 사람들이 화를 낼 테고, 뭔가 다른 것을 원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떤 제도를 민영화하기 위해 흔히 쓰이는 기법이다.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사실상 규제받지 않는 민간 의료보험에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의료보험 체계를 갖고 있는데, 이 체계는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든다.

 

▶기업이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정부가 더 적은 권력을 가질수록, 부자와 권력자의 관점에서는 더 좋은 일이다.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끓어오른 공포와 분노를 악용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실제 행위자들이 아니라 취약한 공격 대상으로 공포와 분노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인물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 그의 사회참여적 저술 활동은 그동안 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과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낳은 폐해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다소 새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 확대가 낳은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을 정면으로 겨냥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요일 #제21대국회의원선거 #2020총선 이 있었다. 선거결과를 지켜보는 내내 어떤 영화보다 더 짜릿하고 재밌었다. 어떤 결과라서 좋았다 싫었다를 떠나 개표방송 만큼 재밌는 방송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우리나라 방송국들의 개표 진행은 해외에서도 화자될 정도라고 한다) 각 정당과 정당의 후보들의 정책에 대해서 내가 모두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구를 대표할만한 인물을 뽑는다는 점에서 불평등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어떠한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것 외에도 어떠한 관점에서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국회에서 논의하고자하는 내용이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쉽다.

 

 

비례정당 투표도 그랬다, 선거 공보물을 보면서 난 솔직히 말해 각 정당이 어떤 식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변화시킬건지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어떤 시선으로 접근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정당이 있다면 주저말고 그 정당을 뽑았을 것이다. #불평등 은 우리나라에서 사실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재밌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본인 불평등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불평등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기득권층들이 불평등을 통해 이익을 얻어서 그러한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이익을 극대화해주는 정치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계급사회에서 벗어나 민주사회라고 말하는 현재는 사실 어떤 시대보다도 더 세밀하게 계급화되고 계층화되어가고 있다. 단일한 입장과 위치도 아니고 불평등과 사회문제에 저항하기 위한 연대는 쉽게 와해되고 이간질된다. 아마 갈수록 불평등의 문제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것은 세계화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공동체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누구의 생각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불평등을 조장할 것이고 누군가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나도 언제가는 기득권층의 권력에 가까워져 그 이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에 그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고, 누군가는 이래도 저래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와 연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변화를 주장할 것이다.

 


-노암촘스키의 [불평등의 이유]를 읽고-

 

 

불평등의 이유: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10가지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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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지 않다-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 경쟁적 혐오를 넘어 같음에 연대하자 #책후기


공정하지 않다 - 박원익/조윤호, 지와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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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청년들이 남녀 대결 프레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발하는 것은, ‘최종 보스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평범한 개인들에게 연대책임을 요구하는’ 불공정한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 사회적 구조를 바꾸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원인’을 없애려고 할 때 오늘의 싸움은 내일을 위해 희망이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내 편’이 된다. 하지만 나쁜 개인을 탓하는 풍토가 생겨나면 이런 다수의 연대는 어려워진다.

 

● 진보 진영이 올바름이라는 가치에 집착하여 자유를 포기하는 사이 특권층을 비호하는 극우 보수 세력은, 표현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엮어 정말 자유로운 세상을 위한 개혁을 막는다.

 

● 국가는 공적인 불공정과 불합리와 불평등을 없애야 하는 것이지,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개인의 윤리를 교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 학생들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사들, 대중들은 나쁜 사상으로 가득찬 대중문화로부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기에 대중문화를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PC주의자들,

 

● ‘불편함을 통해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PC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더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는 일이 과연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일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기’가 가능하려면 ‘너는 결국 내 처지를 알 수 없다’는 태도나 ‘나는 결국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벗어던져야 한다. ‘고통에 대해서 경쟁하기’를 벗어던지면 상대가 가진 극단적인 모습에만 집착하게 되는 함정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 고통을 비교하는 데만 집중하면 앞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굳어진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때문에 불평등 사회에서 서로 갈등하고 혐오하는 데 질려버린 청년세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고통을 경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누가 더 피해자인지 경쟁하지 말자. 고통과 불행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입맛에만 맞는 것들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대가로, 인식에 대한 교정이나 확장은 포기한다. 공론의 장으로 나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비판하고 설득하기보다는, 듣기 싫은 말과 보기 싫은 것들은 타임라인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만의 높은 성을 짓는다. 성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폐쇄적인 타임라인 안에서, 각자의 주장은 자가발전하며 더욱 공고해진다. 발달한 매체가 소통을 원활히 해주기보다는 소통을 거부한 상태로 특정한 성향만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 젠더갈등으로 청년세대가 갈라지면서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서로가 싫어하는 커뮤니티에서 ‘빻은(주고받은) 발언’을 캡처해 올리는 현상이다. 예컨대 남초 커뮤니티에는 ‘여초 카페 수준’이라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 여초 카페에서 군인을 비하하는 글이나 남성혐오성 글이 올라오면 이것을 캡처해 올리며 “페미니스트들이 이래서 문제”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여초 커뮤니티에도 ‘남초 커뮤니티 수준’이라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 남초 커뮤니티에 올라온 여성혐오성, 성희롱 게시물을 캡처해 올리고 마찬가지로 “이래서 한남들이 문제”라고 비난한다.

 

●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이 말하는 ‘미러링mirroring’은 오늘날 청년세대들이 ‘공통으로 함께 할 수 있는 행동’이 될 수 없다. 미러링은 잘못한 이들의 행동을 반대편에서 똑같이 반복함으로써 그 잘못을 드러내겠다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진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적들만 만들어낸다.

 

 

 

● 영화 〈데드풀〉은 소수자와 약자를 선하기만 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듯이 서로를 놀리기도 하고, 편견도 드러낸다. 영화에서 주인공 데드풀은 레즈비언 커플이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하러 오자 “너희 커플이었어?”라며 놀란다. 커플 중 한 명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거냐’라는 의미의 표정을 짓자 데드풀이 “너 같은 녀석이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거야”라고 말한다.

 

서로의 차이점을 찾아내는 데만 집중하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줄어든다. 여기서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다 함께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같음’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경쟁적 혐오를 넘어 같음에 연대하자


 

 

는 95년생이다. 요즘 책에서 언급되는 새롭고 독특한 세대라고 언급되는 90년대생의 딱 중간인 것이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늘 새로운 세대에 대한 명칭을 붙이고 그 세대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들을 보기는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나의 또래세대가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90년대생이온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나의 또래 세대들이 정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대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느겼다. 나에게는 당연했던 일상적인 것들이 다른 세대에게는 신기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신기했다.

 

공정하지 않다는 90년대생이라는 특징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90년대생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90년대생이온다의 심화버전이라고 할까. 무엇보다 이 책은 90년대생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90년대생들이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책이다. 저자가 분석한 90년대생은 내가 느꼈을 때 근거가 탄탄하고 설득력 있었다. 마치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각 특징에 대한 사례들도 읭?스러운 것 하나 없었다.

 

 

자는 90년대생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에 분노하는 세대로 규정하면서 더 나아가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현상에 대해 해석한다. 젠더갈등, 정치적올바름(PC), 커뮤니티의 폐쇄성, 페미니즘, 미러링 등이 주요한 화두로 제시되는데, 전반적으로 나는 혐오를 극복하는 것,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이 서로의 차이에 집착하기 보다는 서로 같음에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와 나의 생각의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슷한 의견과 자료만 공유되는 한쪽으로 치우진 폐쇄적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소통은 한쪽으로 치우친 연대를 형성하고 서로 다른 입장 차이와 상대진영에 대한 일반화는 경쟁적 혐오를 발생한다. 이는 문제 해결이 아닌 새로운 갈등을 조장하는데 기여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나는 사실 찬성과 반대 딱 입장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점에서는 PC주의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또 그것이 새로운 검열, 폐쇄, 숨겨야하는 것들로 치부되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자를 지칭하는 용어(단어)가 차별적이고 편견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들을 언급하는 것조차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책에서는 PC주의가 다양한 의견이 공유되고 문제에 대한 개방성을 막는 검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미러링이 또 다른 혐오를 형성하는데 기여한다고 했는데, 이 부분에서 난 살짝 달랐다. 사회구조적 혹은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형성된 개인의 일탈적(이리고 표현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에 비난하거나 일반화 하는 것은 문제다, 사회구조 개인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실 저자의 말에 틀린 말은 없다. 나도 전반적으로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고 무엇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고통에 대한 경쟁보다는 같음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사회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 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메갈리아와 같은 커뮤니티의 미러링이라는 방식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미러링을 통해서 불러온 그 효과, 남성들이 여성혐오에 대해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조심하지도 않았으며 성적대상화가 일상적이었던 그 문화에 균열을 가게 했다고 생각했다.

 

 

미투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이 지금까지도 뜨거운 이슈로 언급되는 원인을 생각해봤을 때 말이다. 누구나 도덕적으로 옳고 과정과 결과에서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이 최선이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는 처음부터 쉽지 않다. 나는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같음에 더 집중하고 연대할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너희는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절대 이해하지 못해" 라며 배척하는 태도에 변화를 보여야 하는 것은 사실 저 주장을 하는 집단보다는 상대집단의 개인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90년대생들을 어떠한 하나의 것을 규정하는 것,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특징을 알아보는 것은 이해의 자세로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다른 일반화가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기성세대에서 90년대생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 보다는 세상을 바꾸어 나갈것으로 기대되는 내 또래의 90년대생들을 응원하고 싶다. 지금은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당연한것으로, 지치지 않았았으면 좋겠다.

 

[공정하지 않다-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 

경쟁적 혐오를 넘어 같음에 연대하자 #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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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의 끝] 빈곤과 혐오, 수컷다움과 여성스러움 #책후기


랜만에 읽은 소설책. 소설로 분류되었지만 사실은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자 회고록에 가깝다. 에디의 끝이라는 제목 속 에디는 실제 작가이며 현재 나이는 20대로 내 또래라고 할 수 있다. 에디는 프랑스의 작은마을에 살았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슨 60년대를 살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흔히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프랑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이었다.

에디는 빈곤한 하류층들이 모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그의 부모는 그 마을에 여느 여자와 남자처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가정이다. 그 마을 자체에서 현재 우리의 시선으로 도저히 정상적으로 느껴질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에디는 소년이지만 여성스러운 몸짓과 목소리 때문에 일상 속에서 혐오의 눈길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폭력을 마주한다. 에디는 거부하거나 도망치지 못하고 순응하며, 여성성과 호모(동성애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의 특징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이는 당시 사회 (현재 사회에서도 아마 적용되는) 남성성과 여성성 그 중에서 남성다움 (책에서는 수컷다움이라고 표현되는)을 갖추지 못했을 때 겪게 되는 수많은 고초들이다.

 

 

가 이 책을 읽으면서 헷갈렸던 것은, 에디의 성적지향 보다는 성 정체성이었다. 에디는 스스로 남성에 성적으로 끌린다고 표현하면서, 본인이 여성의 성기를 가졌으면 상상한다. 그러나 에디가 여성이 되고 싶다고 선언하는 부분이 없었다는 점에서 나는 에디가 본인을 어떠한 성별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빈곤은 혐오를 혐오는 폭력을 만든다는 것을 에디의 성장을 통해 알 수 있었으며 과연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어떠한 기준으로 만들어지는지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나는 성별에 따라 부여되는 특징인 여성성과 남성성이 어떤 식으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목격했다.

책에서 에디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성스럽다는 말을 계속 들어왔고, 그것이 하나의 폭력이면서도 세뇌에 가깝다고 느꼈다.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사회적 기존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여성성에 부합된다며,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을 여성성이라는 프레임에 가둬놓는 것이 에디가 남성을 좋아하게 되고 스스로 여성이 되고 싶다고 느낀 시작이 아니였을까 생각했다.

 

 

더이슈에 관심을 가진다면 트랜스젠더 문제에도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는데, 이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왜 그들은 본인의 성별을 바꾸고 싶어할까?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 영화 대니쉬걸을 보면서도 들었던 것이 그 문제였다. 친구 중 한명은 트랜스젠더들은 정신적인 치료가 필요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가령 나는 손가락이 네개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다섯개를 가진 손을 보고 이상하고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나는 애초에 질환의 문제가 아니며 그 예시도 틀렸다고 생각했다)

에디를 보면서 동성애와 성불일치도 사회가 만들어 낸 하나의 혼란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너는 여성스럽구나, 남자답게 행동하렴 혹은 너는 남성스럽구나 여자답게 행동하렴이라고 계속 주위에서 세뇌당할 때. 어린 그들은 아 나는 남성/여성 이지만 남자/여자 스럽게 행동하는 구나, 그렇다면 나는 여성/남성을 좋아하는게 아닐까? 나는 반대의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야 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위의 예시는 나의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는 정도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과 별개의 문제로 성별에 따라 특징을 규정짓는 것 자체에 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별은 생물학적 염색체로 구분되는 단순한 사실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다. 누군가의 몸짓과 행동 그리고 목소리 등은 그 누군가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징일 뿐 어떠한 것들로 분류되거나 낙인 찍힐 수 없다.

 

 

개인이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소수자만을 위한 가치도 아니고 기득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인 것이다. 세상에서 홀로 외롭게 방치되는 이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기를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

 

 

Mr.Assay

by anyoung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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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언어> 장한업 / 아날로그(글담) (2018)

 


 

우리가 쓰는 언어 우리가 만들어 낸 차별 : <차별의 언어> 리뷰

 

 

 

차별의 언어

다양성을 장려하는 시대에 곳곳에서 생겨나는 차별의 언어를 말하다!국내 만연한 차별의 시선을 고치고자 노력해 온 장한업 교수의 『차별의 언어』. 언어가 한 개인의 사고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사회적인 차원에서 살펴봄으로써 다문화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한국인의 언어풍경을 보여준다. 우리 곁에 있으면서 우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이들과 더불어 더 잘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한 결과를 만나볼 수 있다.왜 한국인은 ’우리‘라는 표현을 과도

book.naver.com

 


 

기록하기

 

 

▶ 소수자를 쫓아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문제를 단순화하여 대중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

● 나의 생각 :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다름이 아니라, 같음을 교육해야 한다

▶ wrong이 가치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면, different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한 쌍을 이루는 그림이나 사진은 다를 수는 있어도 틀릴 수는 없기 때문에 ‘틀린 그림 찾기’가 아니라 ‘다른 그림 찾기’라고 해야 하고, 아주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부분 찾기’라고 해야 합니다.

▶ 단일민족과 단일문화의 허상 / 과도한 우리주의 / 집단주의

▶ 즉 조승희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민자들을 미국 사회에 잘 적응시키지 못한 자신들의 정책을 탓했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에 대한 한국인의 과민 반응에 대해 의아해했지요.

▶ 참고로 왕자는 당시 서른 아홉 살의 중년이었고 공주는 열여섯 살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 나의 생각 : 꽃다운 나이가 아니라 어린 나이였을뿐

(차별의 언어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표현은 지양해야하지 않았을까)

▶ 캐나다의 헌법인 권리·자유 헌장 제10조는 열네 개의 차별 요인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종, 피부색, 민족, 국적, 성별, 임신, 성적 지향, 결혼 여부, 나이, 종교, 정치적 신념, 언어, 사회적 조건, 장애입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정당한 사유 없이 구분하거나 배제하면 캐나다에서는 차별이 됩니다

▶ 사회심리학자들은 자신의 편견을 없애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충고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 우리가 만들어 낸 차별

 

 

대한민국이 다문화사회가 되었다는 기사와 뉴스가 보도되었을때가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초중고를 다니면서 다문화교육이란 것을 받았다는 기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인권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 읽었던 책들을 통해서 다문화, 이주자, 이민가정, 외국인근로자 에 대해서 알아갔고, 그들이 받는 차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세계시민교육을 접할 기회가 생겼고 나는 주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세계시민교육을 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다문화교육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차별이라 하면 가장 대표적인 인종차별과 성차별인데, 이를 우리나라의 집단주의와 우리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책 차별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듯한 단일성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차별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차별은 다름에 대한 배척을 의미하고 다양성에 대한 억압이다. 이는 단순히 이주민 혹은 다민족성으로까지 연결짓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남들과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 누군가가 겪고 있는 아픔에 공감하지 않는 자세, 오로지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 앞선 민주주의는 회사 문앞에서 멈춘다 라는 책의 후기에서 남긴 것 처럼, 군대식 조직문화로 대표되는 집단주의, 단일성 등은 한국사회를 차별의 사회로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다문화교육의 실패라는 주제로 쓴 기사를 보았을때, 정말 엄청 난 충격을 받았었다. 다문화교육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강조하는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히려 다수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학생들이 느끼는 반감, 아 결국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더욱 각인시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차별에 앞서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르다는 사실보다는 어떤 부분에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강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한명의 개인이 집단에 속해 있어 집단과 개인을 동화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집단에서는 개인이 존재할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집단이라는 단어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공동체는 한명의 다양한 개인이 모여 동일한 것에 대해 서로 마음을 공유한다면 집단은 개인이라는 다양성은 해체되며 집단으로서의 하나를 강요한다. 한국사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문화시화와 다문화교육이 둘 중에 어떤 것에 해당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 내가 올렸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이야기는 책 차별의 언어와 매우 연관된 단어인것 같다. 페미니스트를 페미나치, 페미꼴통 등으로 비아냥 되듯이 정치적 올바름도 PC충 등으로 조롱되는 글들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차별의 언어의 거론 사례들을 보면서도 특정 사람들은 진지충, 씹선비, PC충이라며 일컫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이럼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차별의 언어는 더욱더 수정되어야 한다.



 

초등학생들 혹은 청소년 더 나아가 나이에 상관없이 재미를 위해서 누군가를 차별하는 언어사용과 단어선택이 차별의 사회를 만들고 자연스럽게 각 인식에서 편견이 자라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주의는 음악, 영화, 예능, 드라마 등 각종 대중예술과 매체에서 더욱 신경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의 검열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도 되지만, 공적기관이 검열을 통해서 이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사람들 스스로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러를 두려워하고 이슬람을 배척하고 난민을 혐오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또는 의도적으로 비의도적으로 쓰는 차별의 언어를 생각하고,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차별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도 글을 쓸 때, 누군가와 이야기 할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차별의 언어> 장한업 / 아날로그(글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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