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법인세 최저세율 도입 논의가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이 구글·페이스북 등 자국 정보통신(IT)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그간 반대해온 디지털세의 일환으로 이를 추진하며 주요 국가 간의 합의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이 일정 수준 이상의 법인세를 걷어 다국적 기업의 조세 회피를 막고 더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다.
우리 정부는 국제 논의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국익을 관철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의 법인세율이 세계 9위 수준으로 높은 편이기 때문에 외자 유출 등의 불이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다. 아일랜드나 헝가리처럼 낮은 법인세율로 해외 기업 투자를 유치하는 국가와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자국 기업들이 법인세가 적은 해외로 이탈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각국에 법인세 하한선을 도입하는 ‘국제 조세 혁명’에 나선 것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등이 수년 전부터 논의하고 있는 디지털세 논의의 연장선이다.
구글 등 다국적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돈을 벌어들이는 국가에 물리적 사업장을 두지 않아 세금을 물리기 어려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다. 특히 특허권 등 무형 자산 소유권을 저세율 국가 자회사에 둬 조세를 회피하는 경우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타깃이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OECD는 미 기업들이 ‘국가간 소득 이전을 통한 세원잠식(BEPS=Base erosion and profit shifting)’방식을 통해 세금을 탈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를 ‘더블 아이리시 위드 더치 샌드위치(Double Irish with Dutch Sandwich)’라고 부르는데, 구글의 예를 들어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구글은 세율이 낮은 아일랜드(12.5%)에 법인을 세우고, 미국 본사에서 개발한 지식재산권을 이 법인에 헐 값에 넘깁니다. 아일랜드 법인은 다시 아일랜드와 네덜란드에 각각 자회사를 설립해 이를 통해 유럽 등에서 영업을 합니다.
아일랜드 자회사는 현지 영업을 통해 얻은 영업이익 대부분을 지식재산권 사용료(로열티) 명목으로 다시 네덜란드 자회사를 통해 아일랜드 법인에 넘깁니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 간엔 로열티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협정이 있어 이 과정에서 세금을 줄일 수 있습니다.
미국은 다만 기존 디지털세에서 최저 세율을 올리고(12.5%→21%)과 부과 대상을 확대(빅테크 기업→세계 매출 100대 기업)하는 쪽으로 바꿔 제안했습니다. 미국의 법인세율 인상 움직임에 비례해 최저세율을 높여 미국의 충격을 줄이면서, 과세대상도 미국 중심의 빅테크기업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제조·서비스사들까지 포함시키자는 의도입니다.
한국은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일단 법인세율이 27.5%(지방세 포함)로 미국이 제안한 최저세율에 비해 여유가 있어 인상 압박은 덜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삼성전자나 현대차그룹등 글로벌 기업들 입장은 다릅니다. 해외 사업장이 많고 수출 비중이 높다 보니 생산과 판매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외 전략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법인세를 주요 국가 중 최고 수준으로 올리는 제안인데, 우려도 만만치 않다. 미국 기업을 법인세가 낮은 외국으로 이탈시키거나, 외국 기업에 비해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글로벌 최저법인세가 도입되면, 법인세 인상 조처에 따른 미국과 미국 기업의 불이익을 막을 수 있다.
글로벌 최저법인세가 현실화 되면, 대기업의 부익부 및 각국의 국가재정 부실화를 초래하는 법인세 인하 경쟁을 막는 효과가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조세재단의 분석을 인용해 1980년 전 세계 법인세율 평균은 40%였지만 2020년 23%로 낮아졌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지난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재무장관들이 다국적 기업에게 최저 세율을 강제해 다국적 기업의 조세회피를 막는 방안을 논의하는 등 수년간 글로벌 최저법인세가 논의돼 왔다
최근 들어서는 상장사들의 실적 개선과 경제 회복 기대감이 다시 증시를 지탱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규모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밝히면서 재원 마련을 국채 발행 보다는 증세를 기반으로 하겠다고 강조한 것도 호재가 됐다. 국채 금리의 추가 상승 우려를 불식시키면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4월 들어 코스피 시장에서 순매수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미국 증시는 재무부의 바이든 법인세 인상 계획을 자세히 설명 이후 지난주 이틀 연속 상승세에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글로벌 법인세 최저세율 도입에 대한 주장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얻고 있다. 이는 지난 5일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제안한 것으로 기업들이 조세회피처 국가로 이익을 이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주요 20개국(G20)이 협력하자는 내용이다.
이미 공식적인 법인세가 25%인 중국 본토에서는 글로벌 최저 법인세가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테지만, 미국이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하 등 확실한 혜택을 주지 않는 한 쉽게 해당 논의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SCMP는 그러면서 "중국이 우려하는 바는 글로벌 최저 법인세가 (본토보다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조세 피난처인 홍콩에 끼칠 영향"이라고 밝혔다. 그간 낮은 세금으로 외국 기업들을 유치해왔던 홍콩에는 타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EU(유럽연합)의 쌍두마차인 독일과 프랑스는 이날 최저 법인세율을 공통적으로 준수해 국가 간 세금 인하 경쟁을 지양하자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의 전날 제안을 환영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전 세계적인 세금 인하 경쟁을 중단시킬 수 있는 신바람 나는 논의”라고 했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도 “국제 조세에 대한 지구적 차원의 합의가 가까워졌다”며 반겼다.
미국·독일·프랑스가 한목소리를 내면서 ‘세원 잠식 및 소득이전(BEPS)’ 대응 협의체를 통해 각국이 준수해야 할 최저 법인세율을 정할 수 있을 것으로 로이터통신은 전망했다. BEPS 대응 협의체는 다국적 기업이 이익을 법인세율이 낮은 나라로 이전시켜 세금을 회피하는 행태를 막기 위한 모임으로, 약 140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다.
현재 미국 내 법인세 인상부터 공화당과 일부 민주당의 반발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주 초 바이든은 초당적 지지 없이도 증세 법안을 통과시킬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냈으나 8일(현지시간) 연설을 통해 공화당의 협력을 촉구하며 증세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연설 직후 외신은 애초 바이든 대통령이 주장한 법인세 28%를 25%까지 협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 바이든 법인세 28%에서 25%로 합의할 수도(4.7.로이터)
로이터통신이 백악관 관계자와 인프라 투자와 관련된 미 기업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대부분의 응답자가 25%에 법인세가 합의될 것이라며 이는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답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초대형 인프라 프로젝트 재원을 법인세 인상으로 조달할 방침이다. 현행 21%에서 28%까지 법인세율을 올리겠다는 데 기업들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미 상공회의소 등 여러 기업 단체들은 세금 인상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면에는 인프라 정비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내온 기업들도 있다는 것이다. CNBC가 취재한 워싱턴DC 로비 업계 말에 따르면 최근 바이든 인프라 사업 계획과 법인세 인상 등 방향성에 대해 문의하는 기업들의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디지털세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고정사업장이 없이 해외에서 사업하는 다국적 디지털기업에 과세하는 세금을 말한다. 두 가지 접근법으로 구분된다.
필라1은 구글처럼 고정사업장이 없는 기업들이 시장 소재지국에 세금을 내도록 하는 내용이고, 필라2는 기업이 자국에 본사를 두고 세율이 낮은 다른 나라에 자회사를 두어 조세부담을 회피하는 경우 자국에서 추가로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기업의 경우 필라2 일부에서 제한적 세부담이 우려되는 가운데 필라1 발동 시엔 해외 수출이 많은 주요 대기업들의 세부담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뿐 아니라 아르헨티나 등 많은 나라에서 코로나19 대응과 경기부양과 관련해 증세 논의가 활발하다. 여기에 국제통화기금(IMF)마저 각국이 재정건전성을 보완하고 양극화 완화를 위해선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오랜 기간 감세 쪽으로 기울었던 각국의 세제정책 무게중심이 증세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데다, 이런 움직임이 특정 나라만이 아닌 글로벌 차원에서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증세 논의가 사실상 실종된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크게 대비된다.
영국은 2023년 4월부터 법인세 최고세율을 현행 19%에서 25%로 인상하는 것은 물론, 자본소득 과세 강화도 검토 중이다. 앞서 영국 런던정경대 등 학자들로 구성된 ‘부유세위원회’는 지난해 말 일회성으로 5% 재산세 부과를 주장했다.
이웃한 독일 역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부유세 부활 목소리가 높다. 남미의 일부 국가들에선 이미 부유세가 도입됐다. 아르헨티나는 전체 납세자의 0.8%인 최상위 부자 1만2천명에게 일회성 세금을 부과해 30억달러(약 3조3600억원)를 코로나19 대응에 쓰기로 했다.
비토르 가스파르 국제통화기금 재정담당 국장은 “코로나19는 불평등을 악화시켰고, 이는 사회적·정치적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며 “불평등 완화를 위해 교육, 의료, 사회 안전망 등을 강화해나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세금 인상과 공공지출의 효율성 향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증세의 해법으론 소득세와 법인세의 누진율 강화는 물론, 한시적으로 사회적 연대를 위한 부유세 도입 등이 꼽혔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에선 증세를 위한 논의가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 코로나19에도 소득이 늘어나거나 높은 소득이 있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한시적으로 추가 과세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재난연대세’를 발의했고, 올 들어 더불어민주당의 이상민 의원이나 이용우·유동수 의원 등이 고소득자에게 사회연대특별세를 부과하거나 사회연대기금 마련을 위한 법안 발의를 준비한 바 있다.
바이든 레짐의 핵심 타깃은 기업의 잉여현금(free cash)이다. 기업이 재투자와 빚 청산 등 사업활동 과정에서 쓰고 남아 경영진이 주주에게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등으로 돌려줄 수 있는 돈이다.
잉여현금은 미국 리버벌(진보) 진영이 예의주시한 곳간이다. 미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가 2000년 이후 벌인 경제개혁연구(해밀턴 프로젝트)에서 “기업의 잉여현금이 소수의 대주주에게 집중적으로 돌아가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있다”며 “이를 활용해 인프라 개선에 쓰면 미 경제의 잠재 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이든의 계획대로 이뤄지면 우선 기업의 배당과 자사주 매입이 우선 줄어들 전망이다. 1980년 이후 강화한 '주주 자본주의'가 약화할 수 있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이코노믹 어드바이저가 이날 칼럼에서 “바이든의 인프라 투자는 (노동자와 견줘) 주주들에게 더 큰 비용을 전가할 수 있다”고 경고한 까닭이다.
우리 기업들은 디지털세가 구글·아마존 등 정보기술(IT) 기업에 국한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미국·EU 등이 재정 확보 차원에서 대상을 제조업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특히 삼성전자·LG전자·현대차 등은 수출의존도가 높고 해외 매출 비중이 커 디지털세의 범위와 세율이 확대되면 고스란히 증세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미국은 자국 기업 차별이라며 디지털세 도입에 반대해왔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며 태도를 180도 바꿨다. 디지털세 도입에 동의하는 대신 적용 대상 기업을 늘리고 글로벌 법인세율 최저 한도를 도입하는 ‘딜’을 성사시키겠다는 복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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