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과 1989년 중국 톈안먼(천안문)에서 발생한 중국 정부의 시민 무력 진압 사건을 말한다. 1976년 발생한 사건은 당시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국 정권에 항거하여 시위를 전개한 시민들을 중국 당국이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톈안먼 사태는 1989년 사건을 가리키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을 무력 진압하면서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건을 지칭한다
1976년 톈안먼 사태
1976년 4월 4~5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국 정권에 항거하여 시위를 전개한 시민들을 중국 당국이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이는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 풍조와 마오쩌둥의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민중의 저항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사태의 배경과 경과
1976년 4월 4일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추도하기 위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인 군중들이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에 화환을 바치는 가운데,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칭(江靑) 등 문혁파(文革派)를 비난하는 표어와 구호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에 북경시 당국은 4월 5일 새벽 저우언라이를 추도하는 화환을 철거했는데, 이에 학생들이 방화 등을 하며 반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마오쩌둥·장칭 집단은 톈안먼 광장에 광장 주위 정규군 3개 사단과 약 4만 명의 민병을 투입하여 유혈 진압함으로써, 3000여 명이 사망·부상·체포당했다.
사태 이후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비판을 받고 실각됐으며, 화궈펑(華國鋒)이 새로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1976년 10월 강청 등 4인방(四人幇)이 체포되면서 덩샤오핑은 이 사건과 관련 없음이 발표되었고, 이에 1977년 7월 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당 부주석에 복권되었다.
덩샤오핑은 1977년 복권되면서 개혁개방 노선을 실행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자본주의적 병폐가 드러나게 되었다. 더욱이 경제적 개혁(시장기구의 채택)에 비해 정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아(신권위주의 일당독재) 기득권을 가진 공산당의 부정부패 등이 만연하게 되었고, 급증하는 인플레이션과 소득격차의 확대 등으로 일반 민중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감이 고조되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일반적으로 톈안먼 사태는 1989년 발생한 사건을 가리키는데, 이는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에 대해 중국 정부가 계엄군을 동원하면서 사상자를 발생시킨 유혈 사태를 지칭한다.
사태의 배경
1989년 4월 당시 급진 개혁주의로자이자 학생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총서기가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베이징 대학을 중심으로 보수파에 대한 비난 등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들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야오방의 장례식을 계기로 그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일반 시민이 가세해 민주화운동으로 확산됐다. 이후 민주화 요구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톈안먼에서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 시민 등 100만 명이 연일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했다.
사태의 경과
연일 대대적인 집회가 계속되자, 당내 보수파(덩샤오핑)는 이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6월 4일 새벽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1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중국 정부는 200명 사망 주장)하는 등 최악의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사태 이후 열린 제13기 4중전회(四中全會)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민주화 시위를 지지해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장쩌민(江澤民) 상해시 당서기장이 총서기로 선출됐다.
서방 국가의 반응
서방 각국은 톈안먼 사태에 대해 중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하였고, 특히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해 ▷정부 고관에 의한 접촉의 금지 ▷군 관계자의 교류 정지 ▷무기와 고도기술의 수출 금지 등의 제재조치를 발동하면서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해 7월에 파리에서 열린 선진국 정상회의에서도 중국을 비난하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사태에 대한 각국의 견해가 각각 다르고, 미국도 이후 부시 대통령의 보좌관(국가안전보장 담당)을 베이징에 대사로 비밀리에 파견한 것이 밝혀지자 점차 타협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특히 일본 정부가 중국을 고립시키기 않도록 각국에 공작한 결과 각국의 제재조치는 점차 완화되었으며, 미국도 최혜국대우에 대해서 무조건으로 연장을 인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톈안먼 사태 - 천안문 사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1959년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이 지나치다는 점을 인정하고 유소기(류사오치)에게 주석 자리를 넘겼어요. 1961년 마침내 주은래(저우언라이)와 유소기, 등소평(덩샤오핑) 등의 인물이 개혁의 깃발을 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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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毛澤東)의 주도하에 1958년부터 1960년 초 사이에 일어난 노동력 집중화 산업의 추진을 통한 경제성장운동
급격한 공업노동력 수요로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착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필수품의 공급부족이 일어났으며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농업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여 동안의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농ㆍ경공업의 퇴보와 중화학공업의 과다발전이라는 기형적 결과를 낳으며 중국 전체 경제적ㆍ문화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약진운동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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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개인이 소규모의 토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된 작물은 팔아서 자신의 이익으로 챙겨도 됩니다.”
그런 정책을 펼치자 농민들은 의욕을 되찾았어요. 생산량도 점차 늘어났지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인민공사의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없앤 지역도 있었어요. 그리고 실질적인 발전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우대를 받기 시작했지요.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훌륭한 고양이다!”
등소평은 이렇게 말하면서 개혁에 앞장섰어요.
개혁파의 등장으로 잠시 물러나 있던 모택동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더구나 개혁파의 인물들이 점점 권력을 키워 나가자 불안감이 몹시 커졌지요. 모택동은 1962년 1월에 열린 당 간부 회의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굴욕까지 당했어요.
모택동은 개혁파를 밀어내기로 마음먹었어요.
먼저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기로 했어요. 모택동은 1965년 젊은 문화평론가 요문원(야오원위안)에게 <해서파관1)>이라는 극본을 비판하는 글을 쓰라고 부추겼어요. 요문원은 <해서파관>이 팽덕회를 옹호하고 모택동을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평했어요. 모택동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쫓겨난 팽덕회를 황제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쫓겨난 ‘해서’로 비유했다는 것이지요.
1966년 5월에는 북경대학의 한 철학 강사에게 모택동을 옹호하는 대자보2)를 대학에 붙이게 했어요.
모택동의 사상에 반대하고 당의 지시에 반대하는 자들은 철저히 박멸되어야 한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아무리 새로운 주장을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모택동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수많은 젊은이들은 흥분했어요.
개혁으로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안 돼. 우리가 직접 공산주의를 지키자!”
청화대학과 북경대학 등 학교를 중심으로 홍위병이 점점 많아졌어요. 이들은 자신을 ‘공산주의를 지키는 홍위병’이라 불렀어요. 모택동을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교사’라며 따랐지요. 모택동은 이 내용을 라디오 방송은 물론 <인민일보>에 내보내도록 지시했어요.
1966년 8월 모택동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무산 계급3) 문화 대혁명’을 주장했어요. 반사회주의 세력을 막아 무산자의 주도권을 지키자는 내용이었지요.
1966년 8월 18일에는 문화 대혁명을 축하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100만 명의 홍위병이 모였어요.
홍위병의 활약은 대단했어요.
홍위병들은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비판했어요. ‘우파 지식인’ 또는 ‘지주’라는 누명을 씌워 광장에 내몰았지요. 그렇게 끌려 나온 사람들에게는 고깔모자를 씌워 단상에 세운 뒤, 몇 시간씩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물었어요. 그러면 주변에 모인 홍위병들이 “죽여라!”라고 구호를 외쳤어요.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홍위병에게 끌려 나와 돌팔매4)에 맞아 죽거나 몽둥이찜질을 당하기도 했지요.
이 과정에서 개혁을 이끌던 유소기와 등소평 등 많은 간부5)들이 쫓겨났어요. 개혁에 앞장섰던 유소기는 자기 집에 갇혀 살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개혁을 이끌던 등소평은 당에서 쫓겨나 공장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어요. 모택동의 사상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이유였지요. 그의 아들도 청년 홍위병들의 고문에 시달리다가 다리를 다쳐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했어요.
이러한 끔찍한 테러와 숙청은 이후 10년간이나 계속되었어요. 이 사건을 ‘문화 대혁명’이라 해요.
하지만 1976년 9월 모택동이 죽자 등소평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어요. 등소평은 ‘개혁’과 ‘개방’을 외치면서 경제 발전에 온 힘을 쏟았어요. 먼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하고 인재들을 뽑아 서유럽에 견학을 보냈어요. 자신이 직접 자본주의의 강대국인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이런 노력으로 중국의 경제는 점점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일자리도 늘었고, 먹을 것이 풍족해졌지요.
“등소평은 발전하는 중국을 이끄는 설계사6)입니다!”
등소평은 그런 칭송을 받았어요. 세계의 사람들은 중국을 ‘아시아의 떠오르는 용’이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에서 민주주의는 허용되지 않았어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고, 정부는 비판의 목소리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지요.
국민들은 점차 민주화를 이뤄야 한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중국의 경제는 발전했지만, 부의 분배7)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우리에게는 당의 정책을 비판하고, 당 간부의 부패를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목소리는 북경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어요. 다른 곳에서도 시위가 열렸어요. 1989년 5월 중순에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어요. 이곳에서 학생들은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하자고 외쳤어요. 그러자 수백만 명의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학생들을 지지했지요. 결국 북경 시내가 거의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어요.
당과 정부를 이끌던 관료들은 재빨리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그리고 광장에 모인 국민들을 해산시키려 했어요. 하지만 시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확산되었어요.
그러던 6월 3일 밤부터 군대가 동원되었어요. 그들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그 탓에 광장에 있던 학생 수천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이를 천안문 사건이라 불러요.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 대혁명과 천안문 사건 (처음 세계사 10 - 현대 세계의 냉전과 변화, 2017. 2. 9., 초등 역사 교사 모임, 한동훈, 이희은)
천안문 사태에 대한 중국 당국의 호칭이 왔다 갔다 한다.
“89년 6월 4일 사태 발생 당시엔 ‘동란’ 또는 ‘폭동’으로 불렸다. 이후 ‘정치 풍파’로 변했다. 그래서 한동안 중국에서 간행되는 출판물엔 ‘베이징 풍파’란 표현이 쓰였다. 한데 지난해 또다시 바뀌었다.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가 개혁개방 40주년 역사를 정리하며 천안문 사태를 다시 ‘폭란(暴亂)’이라고 규정했다. ‘정치 풍파’란 말은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동란’ 또는 ‘반혁명 폭란’이라 부르는 건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간 것이다. 부정적인 색채가 강하다. 내가 보기엔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다.”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지 30년이 흘렀다. 그런데 왜 지금도 이렇게 중국 당국은 민감하게 대응하나.
“중국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서방은 청년이 노인을 추월하는 ‘살부(殺父)의 문화’를 갖고 있는 반면 중국은 반대로 노인에 대한 청년의 도전을 불허하는 ‘살자(殺子)의 문화’가 있다.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한다. 현재 천안문 사태와 관련이 있는 여러 사람이 이미 당국에 의해 ‘조용히 있으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6.4 사태는 중국의 역사 발전에서 어떤 의미를 갖나.
“우선 중국이 민주화를 향해 나아갈 역사적 기회를 놓쳤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덩샤오핑은 과거 양극화가 출현하면 개혁은 실패한 것이라 했다. 현재의 양극화 현상을 놓고 개혁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제적으론 실패한 것이다.
또 비록 89년 민주화 운동이 중국에선 실패했지만 나비 효과를 일으켜 얼마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이 끝났다. 어찌 보면 세계 역사를 바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인이 당시 흘린 피는 충분히 기념할 의미가 있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헌법을 수정해 국가주석 임기의 제한을 없앴다.
“이론상으로 시 주석은 나이가 90대인 2049년이나 2050년까지도 집권할 수 있다. 현재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10년은 너무 짧고 최소 20년은 있어야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는 한·중 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홍콩에 특파원으로 주재하던 필자를 포함한 한국 기자들은 마침 5월 16일로 예정돼 있던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30년 만의 중·소 화해’를 취재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천안문광장의 시위를 목격하게 됐다.
당시 필자를 포함한 한국 언론사 홍콩특파원 대부분은 취재 목적이 아니라 홍콩 기업의 컨설턴트 자격으로 비자를 받아 취재를 하던 상태였다. 비자 만료일인 5월 30일, 천안문광장 시위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홍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홍콩으로 나온 직후 비자를 다시 신청해 인민해방군의 유혈진압이 있은 5일 후인 6월 9일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취재를 계속했다.
뉴욕타임스 베이징특파원 크리스토프 기자의 6월 4일자 기사는 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사망자 수와 관련해 이렇게 보도했다.
“베이징 시내 3개 병원에 68구의 시민들 시신이 들어왔고, 다른 4개 병원에도 다수의 시민들 시신이 들어왔으나 그 숫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5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대부분은 총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일부 사망자들은 해방군의 장갑차들이 시민들이 설치해놓은 바리케이드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장갑차에 깔려 죽기도 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민주와 비민주를 판단하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지난 6일 ‘중국공산당과 세계 정당 지도자 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한 말이다. 중국 국민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곧 중국은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실제 중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2018년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있다. 국제여론조사기관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가 중국인 3036명에게 물었다. ‘당신의 나라는 얼마나 민주적인가. 0~10점까지 점수를 매기시오.’ 중국인은 이 질문에 평균 7.13점을 줬다. ‘완벽한 민주주의’를 뜻하는 10점을 준 비율도 15.0%나 됐다.
다른 설문들도 중국인의 체제 만족도가 경이로운 수준임을 보여준다. 2019년 11월 세계적 설문조사업체 입소스글로벌이 27개국을 대상으로 자국 정치 체제에 대한 의견을 조사했다. “현 정치제도가 국민 의견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긍정 의견을 낸 비율은 세계 평균 27%였다.
스웨덴은 31%, 독일과 미국은 26%, 한국은 21%였다. 그런데 중국은 무려 69%가 긍정 의견을 냈다. 세계 평균을 한참 넘어선 것이다. 하버드대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중앙정부 만족도는 2003년 86%, 2016년 93%, 2020년엔 95%로 해마다 올라가 불만족하는 사람이 비정상인 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앤드루 네이선(Andrew Nathan) 미 컬럼비아대 교수와 시 티안지안(Shi Tianjian) 듀크대 교수가 1990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국인 중 55%가 “중국인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톈안먼(천안문ㆍ天安門) 사태가 일어난 지 1년 뒤 이뤄진 조사였다. 이후 3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978년 경제 부분 개방,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도입, 2001년 WTO 가입…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 내에 자본주의를 흡수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 빠르게 성장했다. GDP(국내총생산)는 1980년 1911억 달러에서 2019년 14조 달러로 70배 넘게 성장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명실상부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G2’ 반열에 올랐다.
중산층도 급격하게 성장했다. 2000년대 초 우리나라 인구보다 적었던 중국 중산층은 현재 4억명을 넘었다. 중산층이 성장하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게 주요 정치학 학설 중 하나다.
하지만 중국 중산층은 이와 달랐다. 원동욱 교수는 “중국 중산층은 공산당이 주도한 경제 개방의 혜택을 누린 수혜자”라며 “정치 체제에 대한 불만보다 순응이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1992년 1월부터 한 달 넘게 경제 개방 실험 도시가 몰려 있는 남쪽 지역을 시찰했다. 시찰을 마친 직후 덩샤오핑은 ‘생산력을 높여 인민 생활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경제 발전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줌으로써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불만과 두려움을 느끼던 중국 인민을 달랬다. 덩샤오핑의 메시지를 공산당 간부들이 발전시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을 확립했다.
중국은 독재국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와 큰 차이점이 있다. 부자세습이 이뤄지지 않고 당내 경쟁을 거쳐 지도부가 만들어진다. 리더십 경쟁이 치열하고 지도자 교체를 위한 나이 제한 제도도 있다. 국가 전체로 보면 통제가 가득하지만, 당내엔 신선한 인물과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유입돼 정체를 막는다
“보편적 가치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서구의 가치가 보편적 가치인가. 보편주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보편적 가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2018년 유럽 메르카토르 중국연구소(MERICS)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 중국인 독일 유학생이 한 말이다. 이는 현재 중국 지식인 계층의 생각을 정확히 대변한다.
이 논리를 구체화한 이가 ‘사상의 천재’로 불리는 왕후닝(王滬寧)이다. 중국서기처 제 1서기인 그는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 3명의 주석을 연이어 보좌한 국가전략 부문의 살아있는 전설 같은 인물이다. 이론가로서는 전례 없는 서열 5위에 올랐다. 그림자처럼 주석을 보좌하지만, 전면에 나서지 않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왕후닝은 미국 유학 시절 정치 체제를 공부하면서 서구식 민주주의가 중국에는 맞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권위주의 통치를 기반으로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에 맞서야 한다는 ‘신권위주의’를 주창했다. 중국에는 중국만의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서구의 가치는 보편적이지 않다는 논리가 그의 작품이다.
이는 공산당에 의해 널리 중국인들에게 전파됐다. 원동욱 교수는 “서구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던 미국에서 파시즘에 가까운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중국인들은 중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체제 안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연료인 ‘논리’와 ‘애국심’은 공산당 선전으로 대중에게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다. 2019년 중국은 공산당 정책 학습용 앱 ‘학습 강국’을 만들어서 보급했다. 마르크스ㆍ레닌ㆍ마오쩌둥의 사상과 함께 시진핑의 연설 등을 모아놓은 공산주의 사상 학습 서비스다. ‘학습 강국’은 3개월 만에 43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해 앱 다운로드 부문 1위에 올랐다.
중국의 불안요소: 떨어지는 성장 동력과 강해지는 통제
하지만 중국 체제에도 취약점은 있다. 작은 균열이 중국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중 하나가 경제 문제다. 국가 경제는 눈부신 속도로 발전했지만 빈부 격차가 심각하다.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2000년대 중반부터 0.5를 넘어서며 남미ㆍ아프리카 국가 수준에 이르렀다.
2000년대 후반엔 세계에서 드물게도 여성 자살률이 남성보다 25% 높았다. 생활고 탓에 농촌 지역 자살률이 도시 지역보다 3배 많았다.
게다가 경제 성장 엔진이 서서히 멈춰 서고 있다. 중국은 10%대의 고공 성장을 멈춘 데다 이미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중국에선 ‘부자도 안 됐는데 벌써 늙어버렸다(未富先老)’는 진단이 나온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중국의 인구 고령화가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시진핑 주석의 전면적 통제 정치도 또 하나의 리스크다. 시진핑 주석은 과거 지도부의 유연한 대처를 버리고 완전한 통제와 강력한 법치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관료 부패에 칼을 들이대 9년 동안 400만명을 적발하고 370만명을 처벌한 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검열과 감시가 사회 전반에 퍼져 사회 불안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중국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됐고 국민은 CCTV로 일상을 감시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