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티아 센-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새 지평을 열다!
장상환/경상대 교수2009.11.27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Amartya Kumar Sen, 1933년 11월 3일~)은 인도 벵골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1998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후생경제학, 경제발전론, 경제철학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대가로서 ‘경제학계의 테레사 수녀’로 불린다. 1953년 인도 캘커타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렸을 때 인도에서 겪은 기근과 빈곤 등의 충격적 경험으로 불평등과 빈곤 연구에 큰 힘을 쏟았다. 런던경제대학, 옥스퍼드대학, 하버드대학,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등에서 활동했고 현재 하버드대학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집단적 선택과 사회복지』(1970), 『빈곤과 기아 : 자격과 박탈에 관한 에세이』(1981), 『불평등의 재검토』(1973), 『윤리학과 경제학』(1987), 『자유로서의 발전』(1999), 『살아 있는 인도』(2005) 등이 있다.
센의 업적은 일찍 주목받았지만 1980년대의 경제학 분야는 효용극대화와 비용편익분석으로 경제 이외의 사회현상까지도 설명하려는 ‘경제학 만능’ 풍조가 극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센은 아시아 외환위기로 신자유주의가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1998년에 뒤늦게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인간은 이기심만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초기에 센은 후생경제학의 주제인 사회선택이론과 씨름하여 인간행동의 동기를 이기심을 넘어서는 차원까지 확장했고, ‘합리적 바보’(rational fools)라는 논문도 썼다.
각자가 이기적으로만 행동하면 사회적으로 바보스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판단은 이기심뿐만 아니라 평등, 계급적 처지, 가족 상황 등 효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봤다.
센은 행복(well-being)을 소득, 재산, 효용, 자유, 기초재, 능력(capability) 등의 차원으로 확장하고 특히 ‘능력의 차이’를 강조했다. 능력이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목표들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기능을 말한다. 따라서 빈곤은 생존하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여러 기능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센은 많은 기근의 경우 식량공급이 크게 줄지 않았는데도 임금하락, 실업, 식량가격 상승, 식량분배시스템 취약 등의 사회경제적 요인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린다고 봤다.
센의 연구는 식량위기 문제를 다루는 각국 정부와 국제조직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책담당자들은 당장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공공사업 등을 통해 빈곤층의 소득을 증진시키고 식량가격을 안정시키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센은 빈곤과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수를 발전시켰다. 빈곤율만으로는 빈곤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보고 대안으로 ‘센지수’(Sen Index)를 고안했고, 유엔개발계획이 1990년부터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에는 그의 ‘능력’ 개념이 도입되었다.
센지수 : 빈곤인구비율, 빈곤층 소득을 빈곤선까지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소득갭비율, 저소득층 내의 소득불평등지수 등을 종합하여 계산된다.
인간개발지수: 기대수명, 문자해독률과 진학률, 1인당 국민총생산 등을 종합해서 계산된다.
발전은 능력과 자유의 증진
센은 경제학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 윤리학을 경제학에 접목하려고 했다. 그는 경제발전의 목적이 ‘자유의 신장’이며 인간은 다양한 행위를 수행할 ‘능력’을 갖출 때 실질적인 자유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유의 확대는 경제주체의 경제활동을 촉진하므로 경제발전의 일차적인 수단이라고 했다. 센은 또한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발전의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독재보다 민주주의 하에서 정부는 유권자의 요구에 부응하기 때문에 대량 기근과 같은 사태는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소득분배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한국도 마찬가지 상황에서 센의 연구는 문제의 인식과 해결방향 수립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다.
그러나 센은 시장기구가 효율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옹호하면서 시장과 자본주의를 사실상 동일시함으로써 세계화의 부작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공황의 발발, 독점자본의 지배 등 자본주의 경제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빈곤국에 초점을 맞춰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불평등과 거품을 야기하는 금융자산과 부동산 소유의 불평등과 해결방향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한 것도 한계다.
[CCEJ 칼럼]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2011. 07. 27
이근식 경실련 공동대표 (서울시립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오늘은 자유주의가 진보적인가 아니면 보수적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는 아마도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큰 혼란의 요인일 것이다. 자유주의는 수구⦁보수적인 생각 같기도 하고, 진보적인 생각 같기도 하다.
이런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자유주의의 두 가지 개념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이 두 가지로 구분하면 자유주의의 진보성과 수구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진보적인 데 반해 경제적 자유주의는 수구ㆍ반동적이다.
자유주의는 윤리적 자유주의, 정치적 자유주의 및 경제적 자유주의의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윤리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성(자유의지)을 가장 중시하는 가치관 내지 인생관을 말한다. 가치관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할 문제이므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윤리적 자유주의를 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둘이다. 이 둘을 보자.
앞서 본 것처럼 원래 자유주의는 근대 유럽에서 르네상스, 종교전쟁 및 시민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부르주아들에 의하여 생성ㆍ발전되었다. 이들은 만인의 사회적 평등, 종교ㆍ사상ㆍ언론의 자유, 관용, 집회와 결사의 자유, 인권의 보장을 주장하였고, 이런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런 내용은 모두 정치적 자유로 포괄할 수 있으므로 이런 주장을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라고 부를 수 있다 ― 이글에서와 달리 롤즈(John Rawls)는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관용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주장을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불렀다.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정치적 자유를 쟁취한 부르주아들은 한 걸음 나아가서 경제활동에서의 자유(장사에서의 자유)를 주장하게 되었다.
시민혁명이 성공하기 이전 대략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서구는 중상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유럽 국가들 간에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이 빈번하였다.
이 때문에 각국 정부는 국가재정자금을 얻기 위해 경제에 깊이 개입하였다. 보호무역주의, 주요 기간산업의 직접경영이나 지원, 독점적 영업권 부여 등이 중상주의의 일반적 정책수단이었다.
중상주의의 이런 경제규제는 결국 정부와 유착한 대자본에게만 유리하고 유착에서 배제된 중소상공인들에게는 불리하였다. 그리하여 중소상공인들은 정부의 경제규제를 반대하여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주장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중소상공인들의 주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소상공인들은 정부의 경제규제를 철폐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는 자유방임의 경제를 원하게 되었다. 경제활동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런 주장이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 혹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 doctrine)라고 부른다.
정부는 치안과 같은 법질서만 확립하고 경제는 기본적으로 민간의 자유에 맡기라는 경제정책이 자유방임주의이다. 여기서 기본적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자유방임주의자들도 필수적인 공공복지제도와 공공시설의 건설, 의무 초등교육과 같은 경제에서의 최소한의 정부역할은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시민혁명이 성공한 이후 중소상공인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중상주의가 몰락하고 경제적 자유주의가 실시되었다. 서구에서 대체로 19세기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전성시대였다. 16세기에서 1870-80년대까지의 고전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모두 포함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빈부격차와 불황과 같은 시장의 실패가 분명히 인식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지지는 약화되었으며, 사회적 자유주의, 질서자유주의, 이타적 자유주의처럼 고전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여러 자유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들 여러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할 예정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아직도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비록 자유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만인평등, 종교ㆍ사상ㆍ언론의 자유, 관용, 집회와 결사의 자유, 인권 존중 등과 같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기본 내용이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사회제도를 대부분 지지할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분명 진보적이다. 전번 칼럼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사회진보의 힘찬 원동력인 만인평등사상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기본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회진보의 핵심은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여 만인평등을 실천하는 것이며, 수 천 년 내려온 사회적 악습인 각종의 차별들을 철폐하여 온 것이 만인평등사상이기 때문이다.
재산, 직위, 학력 등에 의한 차별이나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처럼 아직 현실에 남아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 앞으로 점차 해결된다면 그것은 만인평등의 사상 덕분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주의의 다른 내용 및 사회질서도 모두 사회의 진보에 꼭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사상과 언론의 자유나 민주주의 없이 사회진보는 매우 힘들 것이다.
반면에 경제적 자유주의는 보수ㆍ반동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을 반대하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은 공공복지제도를 통한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에 대한 반대이다.
원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인 부르주아지들은 시장경제를, 애덤 스미스가 “자연적 자유의 단순한 체계”(simple system of natural liberty)라고 표현한 것처럼, 저절로 조화tem잘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질서라고 보았기 때문에, 정부가 시장경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대체로 19세기 중반까지잘 돌아가경제적 자유주의가 대세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 덕분에 사회전체의 부는 증대하여 감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들은 비참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하여짐에 따라서 자유주의 내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이 지지와 반대의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이 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영국에서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자유의 주된 적(敵)이 이제는 정부권력이 아니라 빈곤이라고 보고 정부가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을 통해 빈곤을 해결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적 자유주의가 등장한 배경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근로자들의 가난이 개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고 자본주의라는 경제구조의 탓이라는 인식이 등장한 것이요, 둘은 민주주의가 확립된 덕에 정부의 성격이 변하여 과거 전제군주시절과 달리 이제 정부는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미에서 널리 공감을 얻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 영어에서 liberalism이란 말이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두 가지 의미로 혼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자유주의의 관점을 더욱 확대하여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빈곤만이 아니라 불황과 실업, 독과점과 환경파괴와 같은 시장의 실패 전반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경제개입을 대폭 확대한 것이 2차대전 이후의 구미의 복지국가(welfare state)이며, 이런 경제를 수정자본주의(modified capitalism)라고 부른다.
케인지안들을 비롯하여 현대 구미선진국의 주류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들은 대개 경제적 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를 반대하는 개입주의자들이며 이들을 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에선 자본주의에서의 빈부격차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정부의 적극적 공공복지정책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도 계속 존재하여 오고 있다.
19세기 말에 사회진화론을 주장하였던 스펜서(Herbert Spencer)가 대표적이다. 스펜서는 사회도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적 선택을 통해 진화하여 가는데, 정부의 공공복지제도는 이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이 이론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미에서 잠시 크게 유행하였다가 사람이 윤리적 존재임을 부정한다는 비판을 받고 오랫동안 잊혀졌었다.
스펜서 말고도 진보적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가 2차대전 이후 구미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재산의 자유처분권을 비롯하여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보고 정부의 적극적 경제개입을 반대하여 다시 고전적 자유주의의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는 현대에 부활한 고전적 자유주의이다. 가장 불우한 사람의 행복을 높이는 것이 사회정의라는 롤즈(J. Rawls)를 비판하고 개인의 재산권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정의임을 주장한 하버드의 철학자 노직(Robert Nozick), 그리고 하이에크(F. Hayek),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부캐넌(James Buchanan) 등 현대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이다.
정부의 복지정책을 전면 반대한 스펜서와 달리 신자유주의자를 비롯한 현대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적극적인 공공복지제도는 반대하지만 절대 빈곤퇴치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공복지제도는 찬성한다는 점에서 스펜서보다는 합리적이다.
이처럼 현대의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자유지상주의의 두 가지 자유주의로 나뉘어 있다. 이 둘 모두 정치적 자유주의를 지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19세기 중엽까지의 고전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모두 의미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반면에 경제적 자유주의는 지지와 반대를 동시에 받고 있으므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구분하고,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의미만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만약 자유주의에 경제적 자유주의를 포함시킨다면, 롤즈나 드워킨(R. Dworkin) 같은 현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들도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인평등, 사상과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관용, 개인의 독립과 책임, 인권 존중을 주 내용으로 하고 또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지금까지 사회진보의 힘찬 동력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록 민주주의가, 다수의 압제, 선동정치, 의회의 타락, 대중의 정치 소외, 관료주의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들을 갖고 있음이 사실이지만, 현실과 원리에서 의회민주주의가 최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진보성과 보편타당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하겠다.
반면에 공공복지제도를 통한 정부의 적극적 재분배정책을 반대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보수ㆍ반동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세계를 풍미하였던 신자유주의를 통하여 다시 한 번 확인된 바와 같이, 자유방임의 시장경제 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빈부격차와 절대빈곤, 경제불안정이 확대되는데 이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정부를 과신하여도 안된다. 시장에 맡기라는 것은 탐욕에 끝이 없는 재벌들에게 맡기라는 것이요, 정부에 맡기라는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시장도 정부도 모두 불완전하다. 시장이 클수록 시장의 실패(빈부격차, 불황, 실업, 환경파괴, 독과점, 등)가, 정부의 힘이 클수록 정부의 실패(정부의 낭비, 비효율 및 부패)가 증대하기 쉽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정부는 전지전능하고 공평무사한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가정하고 모든 어려운 일들을 정부에게 맡기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정부는 없다.
현실에서 정부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정부가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과 공무원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어진 예산과 권한을 이용하여 공익을 빙자하여 사익을 추구하기 쉽다.
그리하여 정부의 힘이 클수록 정부의 실패가 더 많이 발생하기 쉽다. 선진국에서 1980년경부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주 원인은 전후의 선진복지국가에서 정부의 실패가 증대하고 이에 대한 중산층들의 불만이 누적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시장의 실패를 치유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기능을 인정하더라도 반드시 정부의 실패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동시에 강구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투명성을 높이고 언론과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것일 것이다.
허나 언론과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정치권력과 재벌이라는 타의에 의해, 그리고 돈과 권력의 귀여움을 받으려는 그들 자신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 점점 훼손되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
/이근식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2011년 7월 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주체가 일정기간 창출한 부가가치의 합을 뜻하는 GDP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각 나라의 국민 생활수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지표로 자리매김했다.
2차 대전 이후 70년대 성장 침체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유래 없는 고도성장과 생활수준의 급격한 향상은, GDP 지표의 만능화에 든든한 배경이 됐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선진국의 경제가 급격히 침체되면서 성장 지향적인 경제운영 방식에 대한 회의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됐고, 일부는 GDP가 국민 생활의 질을 반영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GDP의 한계를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한 미국 경제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에 따르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46년부터 70년 동안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행복 수준은 1960~70년 기간에 감소했다고 한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경제 일변도에서 다시 삶의 질 및 환경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GDP 대안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여기에는 유엔개발기구(UNDP)의 인간개발지수 HDI가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인간개발지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센의 역량 이론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는데, 센에 따르면, 사람들의 복지 수준은 단순히 물적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람들의 건강이나 지적능력을 계발해 높은 수준의 삶을 가능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간개발지수는 경제성장과 삶의 질 영역을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1980년 이후에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고조되면서, 87년 브룬드란드 위원회의 보고서와 92년 리우회담의 ‘의제21’와 같이 지속발전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후 지속발전 지표가 만들어지는데 일조했다.
■ 스티글리츠 위원회의 ‘행복GDP’
스티글리츠 위원회는 2008년 1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GDP가 사회적 웰빙, 지속가능성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시중의 우려를 환기시키면서 사회발전을 보다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새로운 지표의 큰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스티글리츠 교수가 주축이 된 이 위원회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측정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 위원회는 삶의 질 측정을 위해, 기대수명과 교육, 개인의 시간활용 만족도, 범죄, 실업, 환경조건 등을 두루 살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28일 OECD 세계포럼에서 “GDP는 사회발전, 시장상황 등을 잘못 측정함으로써 더 나은 지표 개발에 초점을 두지 않았다”면서 “이런 점으로 정치적 행동 등에 있어서 왜곡된 측면을 낳았고 사회 발전에 위험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단적인 예로, 2001년 발생한 아르헨티나 경제위기를 들었다.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직전 국제통화기금(IMF) 회의에서 카를로스 메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GDP 통계를 들어 아르헨티나 정부와 경제가 매우 잘하고 있으며 성공적 사례하고 했지만, 이러한 성장률이 부채를 바탕으로 한 왜곡된 물가에 따른 결과였고 결국은 GDP가 하락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2008년 위기 발생 직전인 2005~2007년의 미국경제는 GDP를 기준으로는 문제 없이 잘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2008년에 모두 허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하면서, “GDP는 정확하지도 않고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 스티글리츠 교수가 주장하는 올바른 측정기준은 무엇일까. 그는 “공공분야의 민영화가 많이 이뤄지고 비시장적 요소가 시장으로 넘어가고 있어 이런 부분이 반영돼야 하고, 복지측정이 정확하게 반영돼야 한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을 제대로 측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경제 측정지표에 중요하게 담길 주제로 환경, 건강 등 웰빙을 강조했다. 특히 환경지속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탄소배출값을 전체 GDP 측정시 사회적 부가가치로 포함시키지 않으면, 이는 버블현상과 더불어 물가를 인상시키게 된다고 지적한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잘못된 경제지표는 정부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큰 위험요인”이라면서 “현 사회가 어떻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보해나가야 할지를 종합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진일보한 경제측정법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