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OTT(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사업자인 ‘넷플릭스’와 국내 초고속 인터넷 2위 업체 SK브로드밴드가 1년 넘게 벌여온 법적 분쟁의 결론을 놓고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인터넷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가 인터넷망에 막대한 트래픽(자료 전송량)을 유발해 매년 수천억원의 추가 투자가 들어가는 상황인데 넷플릭스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며 2019년부터 일정액의 이용료를 요구해왔다. 넷플릭스는 이에 지난해 4월 “돈을 낼 의무가 없다”며 소송(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으로 응전했다. 오는 25일 1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넷플릭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넷플릭스의 서버는 일본에 있다. 우리 필요에 의해 인터넷망을 쓰고 일본 통신사에 서비스 이용 대가(접속료)를 냈다. 한국 내 인터넷망은 (일본의 넷플릭스 서버에서 넘어온 데이터를) 국내 넷플릭스 이용자가 ‘전송’받을 때 사용되는데, 전송은 SK브로드밴드의 의무다. 그러므로 한국 통신사에 사용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다.”
왠지 알쏭달쏭한 넷플릭스의 논리가 먹혔던 이유는 ‘망 중립성(net neutrality)’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통신 회사)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되는 모든 트래픽을 그 내용이나 유형, 제공 기업, 이용자 등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망 중립성 개념은 2003년 미국의 미디어법학자 팀 우(Tim Wu) 교수가 만들었다. AT&T와 컴캐스트 같은 대형 통신 회사를 이용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인터넷 기업이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에 차별 없이 접근이 가능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원칙은 기업들이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와 콘텐츠를 만들어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줌으로써 인터넷 산업 전반이 발전하는 기틀이 됐다.
하지만 2010년 이후 동영상과 게임, 영화, 클라우드(원격 컴퓨팅) 등의 전송량이 급증하면서 망 중립성 원칙을 지키는 데 현실적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구글과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의 데이터 트래픽이 기존 인터넷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난 것이다.
통신 회사들은 “일정한 망 사용 대가를 받지 않으면 인터넷망에 ‘공유지(公有地)의 비극’<키워드>이 일어날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대형 인터넷·콘텐츠 기업이 국내 인터넷망을 과·남용하면서 전체 망의 품질(속도)이 저하되고, 결국 다른 기업들과 초고속 인터넷 이용자들이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미국 FCC(연방통신위원회)는 이러한 통신 회사들의 입장을 반영, 지난 2017년 망 중립성 원칙을 완화한 상태다. 통신 회사들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공공 서비스’가 아닌 ‘정보 서비스’로 변경해 통신 회사들이 통신 서비스의 품질 관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조치의 폭을 넓혔다. 필요할 경우 구글이나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의 트래픽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지난해 대형 인터넷·콘텐츠 서비스 업체에 국내 인터넷망의 안정적 서비스를 유지할 책임을 부과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일명 ‘넷플릭스법’이 시행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법원은 통신사의 CP에 대한 망 이용대가 부과는 정당하고, 일반적인 거래 관행이라고 판시했다. 미국 법원이 차터 가입자(원고) 손을 들어준 것은 차터가 CP로부터 망 이용대가를 받지 못하면 최종 이용자들의 인터넷 요금이 인상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재판은 지난해 4월 넷플릭스가 시작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재정을 넷플릭스가 거부하면서 시작됐으며, 3차례 변론 이후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변론 과정에서 넷플릭스는 △처음에는 망중립성 원칙에 따라 망 이용은 무상이라고 주장하다가 △접속은 유상, 전송은 무상이라고 논리를 바꾸더니△마지막 공판에서는 인터넷 접속이라 하려면 글로벌 연결성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바꿨다.
SK브로드밴드는 △망중립성은 콘텐츠를 차별 없이 다뤄야 한다는 원칙이고 △국내외에서 접속과 전송을 구분한 사례는 없으며(캘리포니아주법만 예외)△접속의 유형은 다양하고 그 중 직접접속의 방식으로 SK브로드밴드의 전용회선을 이용하니 대가를 내라고 반박했다.
김상택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넷플릭스의 콘텐츠들은 대량의 트래픽을 발생시킨다는 특징을 갖는데 트래픽을 더 많이 발생시키는 글로벌 CP가 우월적인 협상력을 활용해 정당한 대가 지급을 거부하면 일반적인 국내 CP들은 우월적인 협상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글로벌 CP의 비용까지 떠안게 돼 인터넷망 이용시장에 중대한 혼란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넷플릭스는 소송으로 대응했다. 논리는 이렇다. 인터넷 망 품질을 유지해야 할 의무는 SK브로드밴드 같은 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ISP)에 있다. 넷플릭스와 같은 콘텐츠제공업자(CP)의 의무는 영화, 드라마 등을 제공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가 유발하는 트래픽 증가에 합당한 이용 대가를 지급하는 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고속도로에 비유한다. 넷플릭스가 만든 초대형 차량(콘텐츠)이 2, 3개 차로를 점거해 운행하고 도로를 손상시키고 있는데도 통행료를 안 내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양측의 법정 공방전은 단순히 ‘돈을 내라’ ‘못 낸다’ 수준이 아니다. ‘망 사용료’, ‘망 중립성’ 등 인터넷의 질서를 정의하는 개념 논쟁도 얽혀 있다. 먼저 망 사용료. 넷플릭스 입장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망 사용료라는 개념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입장이다.
망 이용 대가는 ‘접속료’와 ‘전송료’로 구분할 수 있는데, CP는 접속료만 지불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넷플릭스는 미국→일본 캐시서버(임시 데이터 저장소)→한국으로 이어지는 데이터 전송 체계를 만들어놨는데, 캐시서버를 제공하는 일본에는 접속료를 내지만, 전송에 대한 대가는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가 (같은 조건에서 서비스를 제공 중인) 미국, 프랑스 등에서는 ISP에 ‘망 사용료’를 내고 있다”고 반박한다.
넷플릭스는 또한 특정 서비스에 대해 이용료를 요구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모든 CP는 ISP를 대가 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망 중립성’ 원칙이 이 같은 주장의 근거다. 이에 대해 SK브로드밴드는 망 중립성에 대해 “콘텐츠를 차별하지 말라는 의미지, 무료로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현 시점에서 법원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SK브로드밴드가 승소하면 넷플릭스 공식 제휴사인 KT, LG유플러스도 망 이용료를 별도로 산정하는 계약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
통신사들은 또한 디즈니플러스, 아마존프라임 등 국내 시장 진입을 준비하는 해외 CP에도 망 이용료를 요구할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국내에서 최대 트래픽을 유발하는 구글과의 망 이용료 협상이 본격화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반대로 넷플릭스가 승소하면 국내외 CP와의 망 이용료 협상에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 CP는 물론이고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업체들도 망 이용료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할 가능성이 있다.
넷플릭스는 접속과 전송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쉽게 말해 CP가 최초 연결된 IAP A, 그리고 ISP A와 연결된 ISP B를 통해 이용자인 B로 콘텐츠가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CP인 넷플릭스가 ISP A와 연결되며 '전송료'는 지불해야 하지만 ISP A와 ISP B 사이에서 전송되는 콘텐츠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다. 넷플릭스는 도쿄에서 OCA를 설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고 그 대가를 지급하고 있지만 접속료를 지불하지는 않고 있다.
인터넷 접속과 전송은 구분되는 개념이 맞고, 이미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개념이라는 주장이다. 나아가 특정 ISP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한 이용자가 요청한 콘텐츠의 전송(착신)은 이용자에 대한 해당 ISP의 의무가 맞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SK브로드밴드는 접속과 전송의 개념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없다는 입장이다. 법적으로, 산업적으로 접속과 전송을 나눌 수 없고 그런 선례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미국에서 도쿄로 스트리밍이 넘어와 SK브로드밴드에 연결되는 단계를 수행하는 OCA가 CP의 개념이기 때문에, 넷플릭스의 주장대로 CP가 ISP A에게 전송료를 지불해야 한다면 ISP A를 SK브로드밴드로 봐야 하고, 당연히 망 이용대가는 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넷플릭스가 SK브로드밴드에 망 사용료를 내지 못하겠다고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결이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넷플릭스가 정작 우리나라를 제외한 미국·프랑스·일본에는 망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넷플릭스는 2014년 2월 미국 통신사 컴캐스트와 망 사용료 지급 계약을 맺었다. 이 밖에 버라이즌, AT&T, 프랑스 오렌지 등 미국과 프랑스 통신사에도 망 이용 대가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미국-한국 간 데이터 전송을 위해 일본 도쿄에 오픈커넥트 얼라이언스(OCA)를 설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망 사용료는 일본 통신사에 지불하고 있다. 반면 도쿄에서 국내 넷플릭스 고객을 연결하는 망사용료는 국내 통신사에 지급하지 않고 있다.
넷플릭스와 달리 국내 대표 CP인 네이버, 카카오 등은 망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어 국내와 해외 기업 간 형평성 문제도 지적된다. 네이버, 카카오 등은 매년 총 1000억원 이상의 망 사용료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넷플릭스는 국내 망 이용료는 회피하면서도 네이버, 카카오보다 훨씬 많은 트래픽을 유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트래픽 중 넷플릭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4.81%로, 트래픽은 국내 서비스 시작 3년 만에 약 30배 증가한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국내 대표 CP인 네이버와 카카오는 각각 1.82%, 1.42% 수준에 불과하다.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일명 '넷플릭스법')이 시행된 지 이달로 6개월이 지났지만, 넷플릭스는 한 번도 법 적용을 받지 않았고 국내 사업자가 더욱 많은 규제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법은 넷플릭스가 국내에서 큰 트래픽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망 사용료를 내지 않는 것이 국내 콘텐츠사업자(CP)들에 역차별이라는 지적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어서 '넷플릭스법'으로 불리게 됐다.
별칭과 무색하게 작년 12월 시행 이후 현재까지 넷플릭스는 시행령의 적용을 받은 적이 없다.
이 기간 서비스 오류나 품질 저하 사례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행령 개정안은 인터넷망을 써서 서비스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부가통신사업자가 서비스 안정성을 확보해야 하며, 이를 위해 단말이나 망사업자(ISP) 등 이용 환경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비스 장애가 발생하면 정부는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시정명령에 뒤따르는 사항을 어기면 과태료도 부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