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세대 가까이가 살고 있는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ㄱ아파트 단지에서 택배차량의 지상진입을 막은 지 18일로 3주째가 되어 가고 있다.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집 앞 배송’을 중단했다가 일부 주민들의 항의와 택배사 압박 등이 이어지면서 지난 16일 ‘집 앞 배송’을 재개했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하다. 택배노조는 17일 다시 한 번 택배차량의 지상진입 허용을 요구하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택배사가 해당 아파트 단지 배송에 추가 요금을 받는 등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원형 아파트인 이 아파트 단지 입주자대표회의는 택배차량의 출입을 전면 통제하면서 그 이유로 이 단지에 사는 아이들의 안전 문제를 꼽았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아파트 단지에 택배 배송을 하려면 택배 기사들이 손수레로 각 세대까지 배송하거나 기존 택배차량보다 짐칸 높이가 낮은 저상탑차를 이용해 지하 주차장으로 출입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노조는 이어 “이사, 가전, 가구, 생수, 전기, 재활용 쓰레기차는 모두 지상출입을 하고 있는데 택배 노동자의 입장은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된 조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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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 쪽이 제시한 저상탑차 이용도 어렵다. 하루 평균 250∼400개의 택배 물량을 배송해야 하는 택배 노동자들은 기존 탑차를 이용해야 지금과 같은 적재량과 배송량을 맞출 수 있다. 짐을 실을 공간이 좁은 저상탑차를 이용하면, 배송지와 집하장을 오가야 하는 일이 추가로 발생해 동선과 노동시간이 길어진다.
저상탑차로 운송을 하게 되면, 택배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위험도 커진다. 실을 수 있는 물량이 줄어드니 상·하차 횟수가 많아지는 데다, 탑차 높이가 낮아지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허리를 굽히는 작업 등이 이어지는 탓이다.
아파트 내 택배차량 진입 문제를 두고 나오는 택배 노동자와 입주민 간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런 갈등은 주로 ‘차 없는 아파트’를 목표로 하는 공원형 아파트에서 발생했다. 2018년 경기 남양주 다산신도시 아파트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이 아파트도 택배차량의 진입을 금지했다가, 택배 노동자들이 ‘집 앞 배송’을 거부하면서 수천개의 택배물량이 아파트 앞에 쌓이는 일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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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은 없을까. 만약 아파트 단지에서 계속 택배차량 지상진입 금지를 원한다면 대체인력을 채용하는 방법이 있다. 고령층 일자리 창출 방안으로 꼽히는 ‘실버 택배’가 대표적이다. 고령층으로 구성된 노동자가 단지 앞까지 온 택배를 집 앞까지 배송하는 제도다. 이들의 임금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택배사가 함께 지급하는 경우도 있고, 입주자들이 자체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정부와 지자체 재정을 투입하는 경우 다른 시민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이 때문에 택배기사가 단지 앞에서 끌 수 있는 ‘전동 카트’를 설치하거나 택배차량이 지상으로 통행할 수 있는 시간대를 입주민과 합의하는 방법이 대안으로 꼽힌다. 단지 내 입주민이 이용하기 편한 곳에 무인 택배 보관소를 설치하는 방법도 제시됐다
지상공원화단지는 지상에 차량 통행을 저지해 소음과 매연을 줄이고 입주민의 안전과 쾌적한 환경을 위해 추진된 설계방식으로 2010년 전후로 ‘(지상)차 없는 단지’ 추세가 이어져 신축단지를 중심으로 설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택배 차량의 높이가 2.5~2.7m인 반면 관계법령상 아파트 지하주차장 높이기준이 2.3m 이상으로 정해져 있어 지상공원화단지의 택배 차량 출입 갈등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택배 갈등에 2019년 1월 16일 국토교통부는 지상공원형 공동주택의 경우 택배·이사 차량의 주차장 진입을 위해 주차장 차로의 높이를 2.7m 이상으로 설계하도록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규칙, 공동주택관리법 시행규칙을 개정·시행했고 이 규정은 시행 이후 사업계획승인을 신청하는 경우부터 적용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번에 논란이 된 A아파트는 개정 규정 시행 전 사업계획승인을 신청해 2019년 9월 사용승인을 받은 단지로 지하주차장 차로 높이가 2.3m에 불과해 일반 택배 차량은 지하주차장에 진입할 수 없다. 결국 A아파트와 같이 지하주차장 높이 상향 전에 사업계획이 승인된 아파트들은 지상공원화단지 지속을 위해 택배 갈등에 놓일 수밖에 없다.
노조가 설명한 산업안전보건법 제5조 ‘사업주 등의 의무’에 따르면,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에 따라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조와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산업재해 예방에 대한 조치 없이 A아파트와 저상차량 배송에 합의한 것은 법을 위반한 것이라는게 노조의 주장이다.
택배노조는 "A아파트 측의 일방 결정으로 배송서비스에 문제가 생기고 소속 노동자들이 갑질을 당하고 있는데도 택배사는 대책을 내놓지 않은 채 ‘갑질 아파트’에 동조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CJ대한통운 측은 A아파트 측과 저상차량 배송에 합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CJ대한통운은 "해당 집배점과 아파트 사이에 협의는 진행했지만, 합의는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5000세대 규모의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그라시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안전사고와 시설물 훼손 등을 이유로 지난 1일부터 단지 내 지상도로 택배차량 통행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일반 택배차량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차를 댄 뒤 손수레를 이용해 배송하거나 저탑차량으로 개조 후 지하 주차장을 통해 이동해야 했다. 일반 택배차량은 높이 제한으로 지하 주차장 출입이 불가하다.
택배노조는 지난 14일 개별배송을 거부하며 아파트 단지 입구에 800개가량의 물건을 쌓아 아파트 주민들로 하여금 직접 찾아가게 했다. 하지만 고객들의 항의성 문자와 전화가 택배기사들에게 쏟아지자, 결국 다음 날인 15일 택배기사들은 개인별 배송을 재개했다.
일부 택배기사들이 그라시움 아파트 요구에 따라 저탑차량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도 CJ대한통운 관계자는 "택배차량의 지상출입을 금지한 4월 이전에 그라시움 아파트에 출입하는 CJ대한통운 소속 택배 기사 7명 중 4명은 이미 택배 차량을 저상차량으로 개조한 상태"라면서 "나머지 3명은 기사들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일반 택배차량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택배차량에서 저탑차량으로 개조하는 비용은 보통 100~200만 원 사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조 비용은 모두 기사가 부담해야 한다.
한편 택배노조는 이번 고발을 예고하며 CJ대한통운 측에 ▲고덕동 그라시움 아파트를 배송불가구역으로 지정 ▲배송 건당 추가 요금 부과 ▲저탑차량 모두 정탑차량으로 교체를 요구했다. 정부에도 "즉각적인 '산업안전법상 근골격계 위험요인인 저탑차량 사용중지 명령' 등을 비롯해 적극적인 행정 조치와 감독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택배노동자와 아파트 주민 간 분란으로만 비쳐졌던 배송 거부 사태 뒤에 택배사 대리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 드러났다. 지난 13일 ㄱ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전국택배노조에 보낸 공문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입주자대표회의와 택배 대리점은 택배차 지상운행 방침에 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택배노동자는 대화에 끼지 못했다. 양측 대화로 도출한 결론은 ‘저탑차량 배송 혹은 손수레 이용 배송’이다.
저탑차량 배송이 현실화하면 택배노동자는 차량 개조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 개조비용은 약 200만원 정도다. 높이가 3미터에 가까운 ‘하이탑차’대신 화물칸이 1미터 남짓인 저탑차량은 노동강도도 높인다. 배송·집화 과정에서 허리를 펼 수 없기 때문이다. 차를 개조하지 않을 경우 아파트 입구부터 손수레로 집집마다 배송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시간도 길어진다.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해 지상에 차가 다니지 않는 ‘지상공원형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며 층고 2.3m는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차 없는 아파트도 소방법에 따라 소방도로를 의무 마련하기에 택배 차량이 지상에서 다닐 순 있는데, ‘차 없는 아파트’ 의미가 퇴색한다는 입주민 반발에 택배 대란이 종종 불거져서다. 지하주차장 층고를 2.7m로 높이면 택배 차량도 드나들고 ‘차 없는 아파트’ 운영도 가능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국토교통부는 다산신도시 택배 대란 직후인 2018년 6월 지상공원형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층고를 2.7m로 상향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했다. 일부 예외는 뒀다. ▲지상을 통한 차량 진입이 가능한 경우 ▲재건축·재개발·리모델링 조합에서 지하주차장 층 높이를 2.3m로 건설하도록 결정하는 경우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2019년 1월 이후 사업계획승인된 아파트에선 층고 2.7m가 적용하도록 해 뒤늦게지만 불길 확산은 막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상공원형이자 지하주차장 층고를 2.3m로 설계한 단지들이 최근 속속 준공되고 있어 택배 대란은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해결됐기보다 수년간은 여러 다른 단지에서도 이어질 수 있다. 심교언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층고 상향을 보다 일찍 해야 했다"면서 "2019년 1월 이전 사업승인된 아파트들이 준공되며 택배 대란이 또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지하주차장 층고는 왜 이토록 오랜 기간 2.3m로 이어져 왔을지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나온다. 이는 시공비 상승과 직접 관련이 있다. 층고를 2.7m로 상향하는 것은 불과 0.4m 차이지만 땅을 더 깊게 파야 해 시공비가 꽤 오른다. 국토부의 자체 자료에 따르면, 1000가구 규모에서 지하주차장 1층 층고만 2.3m→2.7m로 확대할 경우 약 9억원, 가구당 약 130만원의 추가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