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라는 보고서를 통해 국내 불법 촬영 범죄 사례를 소개했다. 그중에는 직장 상사가 선물로 준 시계가 알고 보니 몰래카메라였고 한 달 반 동안 피해자의 방을 촬영해 스트리밍하고 있었다는 사례도 있었다.
헤더 바 HRW 임시 공동 디렉터는 "한국에서는 디지털 성범죄가 너무도 만연하다"며 "우리는 여성들로부터 공중화장실 이용을 피하고, 밖에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자기 집에서조차 몰래카메라가 숨겨져 있을 것을 걱정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HRW는 "한국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를 예방하고 그러한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영국의 로이터 통신은 지난 16일 "한국은 몰래카메라(spycam)의 세계적 진원지가 되고 있다"며 "작고 숨겨진 카메라를 사용해 피해자의 알몸, 소변을 보는 장면, 또는 성관계를 촬영한다"고 보도했다.
가디언, 프랑스24 등 다수 외신에서 한국의 불법 촬영 범죄를 '몰카'(molka)라는 용어로 사용했고, 해당 단어는 위키피디아에 영문으로 등록돼있다.
지난해 법무부가 발간한 '2020 성범죄백서'에 따르면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불법촬영범죄)는 2013년 412건에서 2018년 2388건으로 5년새 5.8배나 증가했다. 또한 동종범죄로 재등록되는 비율도 75%로 높았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 등은 지난 3월 '몰래카메라', 즉 변형 카메라는 범죄 및 사생활 침해에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큰 물건임에도 사후 처벌만 가해지고 있을 뿐 사전 관리가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지난 18일에는 '초소형 카메라 판매 금지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아울러 전북 남원 지역의 중학생들이 여학생들의 신체를 불법 촬영하고, 휴대전화 단체대화방을 통해 공유한 일도 있었다. 특히 이는 지난 2019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져온 범죄로 알려졌다.
이같은 일이 반복되자 지난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초소형 카메라 판매 금지 해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인은 “초소형 카메라를 이용해 화장실, 숙박시설, 지하철, 집 등 어디서나 불법촬영을 하는 범죄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이런 초소형 카메라는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구매한 손님이 초소형 카메라를 범죄 목적으로 사용하면 끝이고 셀 수 없는 피해자들이 발생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불법촬영은 재범률이 매우 높고 악질적인 범죄다. 초소형 카메라 유통을 규제해달라”고 촉구했다.
다른 청원인도 전날(22일) ‘불법촬영 가해자 남중생들의 신상공개 및 강력처벌을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에서 “대한민국 여성들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할 학교에서마저도 불법촬영을 두려워해야 하느냐”며 “불법촬영 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이번 불법촬영 가해자 남중생들의 강력처벌과 신상공개를 요구한다”고 호소했다.
일상 생활용품 또는 그런 모양을 한 물건에 촬영·녹화·전송 기능을 심어놓은 제품을 ‘변형 카메라’라고 부른다. 카메라는 물병, 액자, 펜, 안경, 넥타이 핀, 탁상시계, 보조배터리 등 웬만한 모든 물건에 심을 수 있다. 변형 카메라는 수사나 위장취재 등에 쓰이곤 하지만 불법 촬영에도 쓰인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지난 16일 한국 디지털 성범죄 실태 보고서를 통해 “기술적 혁신이 어떻게 젠더 폭력을 조장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카메라가 내장된 탁상시계를 통해 한 달 간 자신의 일상이 고스란히 ‘스트리밍’된 여성의 피해 사례를 공개했다.
카메라를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는 2019년 5762건에 달했다. 수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해마다 6천건 안팎인 점에 비춰볼 때 드러나지 않는 피해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불법 촬영 피해가 끊이지 않자 18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초소형 카메라 판매 금지’ 청원이 올라왔다. 21일 오후 5시 현재 동의자가 9만명을 넘었다.
앞서 2017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몰카(불법 촬영)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와 피해자 보호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대책을 지시했다.
그해 9월 정부는 “인터넷 등에서 변형 카메라를 손쉽게 구입해 불법 촬영 행위가 가능한 문제를 개선하고자 변형 카메라 수입·판매업자에 대한 등록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불법 촬영을 근절해야 한다는 요구는 ‘신기술 발전 저해론’에 번번이 밀렸다.
19~20대 국회에 모두 4건의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법안 검토는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2018년 11월 관련 소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려고 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기술 개발을 틀어막는 형태로 가는 것은 대단히 문제가 많다”(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는 의견이 나왔다.
토론회에 참석한 권창범 변호사는 “변형 카메라를 원천 금지 하자는 게 아니라 이력을 관리하자는 것이다. 축산물도 이력을 관리한다”며 일각의 기술 발전 저해 주장을 반박했다.
국회에서도 여러 차례 제재 움직임이 있었지만, 번번히 좌절됐다. 지난 2015년 9월 장병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처음으로 ‘변형 카메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변형 카메라 취급을 허가제로 하자는 취지였다.
같은 해 10월 조정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초소형 카메라 판매를 허가제로 전환하는 내용의 단속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19대 국회와 20대 국회에서 각각 두 번씩 촬영 카메라 관련 법안들이 발의됐지만, 각 국회 임기가 만료되면서 법안은 자동 폐기됐다.
21대 국회로 들어서는 지난 3월 진선미 민주당 의원이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진 의원은 지난 3일 열린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안 입법 필요성 논의’ 토론회에서 “(이 법안이) 자꾸 규제라고 표현되는데,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누가 어디서 쓰고 있는지를 파악해 문제가 발생하면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몰카와의 전쟁', 4년 전 시작됐다
"몰카 범죄가 더 창궐하기 전에 제지해야 할 때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7년 9월,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리벤지 포르노(보복성 음란물)'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자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 종합대책'을 내놨다. 말하자면 '몰카와의 전쟁' 선포였는데, 당시 정부가 주목한 것은 펜이나 시계 모습을 하고 있는 몰래카메라였다.
정부는 이를 '변형카메라'라고 부르면서 이 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사람은 모두 정부에 등록하게 하고, 이 제품을 사는 사람들의 정보도 기록해 유통 이력을 추적하겠다고 밝혔다.
다음 해 8월 이를 위한 '변형카메라관리법'이 발의됐으나 좌초됐다. 드론, 자율주행차, 로봇청소기 같은 제품에도 카메라가 장착되는 시대에 변형카메라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과도한 규제 때문에 차세대 기술과 신제품 개발에 장애가 되리란 반대론이 힘을 얻었다. 몰카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정부도 여기에 동의했다.
그 뒤 몰카 문제는 잊혔고, 그 사이 카메라 디지털성범죄는 2011년 1,523건(수사 건수 기준)에서 2019년 5,762건으로 4배 가까이로 늘었다.
하지만 초소형카메라 기술은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투박해서 쉽게 눈에 띄던 렌즈 크기는 최근 들어 지름이 2㎜까지 줄어들었다. 피하는 것도, 적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수준이 됐다. 이 때문에 몰래카메라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변형카메라들의 유통 자체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새 '변형카메라관리법'이 발의됐다. 변형카메라 수입, 판매, 유통을 기록토록 하되, 주행이나 방범 등 목적이나 용처가 분명한 생활이나 산업용 카메라는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변형카메라심의위원회'를 구성, 기술 발달로 판단하기 애매한 카메라가 생겨날 경우 변형카메라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토록 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16일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실태를 폭로하는 보고서를 공개하자 로이터통신, CNN, BBC, 파이낸셜타임스(FT), 워싱턴포스트(WP) 주요 외신이 일제히 보고서를 인용해 국내의 실태를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한국은 '전염병'(epidemic)처럼 퍼지는 '디지털 성범죄'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피해자의 삶에 중대한 피해를 입히는 디지털 성범죄가 기술의 발달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현상을 전염병에 비유한 것이다.
FT는 한국 정부가 '성 불평등' 문제 처리 방식이 미흡해 비판받아 왔고, 이것이 디지털 성범죄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난달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이 군에서 성추행을 당한 뒤 생을 마감한 사건과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K-POP 스타와 고위 정치인을 겨냥한 '미투 운동'을 소개했다.
FT는 "한국 공군은 성추행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 미투 운동 이후에도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학대를 막기 위한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꼬집었다.
BBC는 K-POP 스타 정준영씨로부터 디지털 성범죄를 당한 경미(가명)씨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2016년 자신이 처음 정씨를 고소했을 때는 "아무도 (피해에 대해) 듣는 사람이 없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정말 죽고 싶었지만, 내가 죽으면 아무도 정준영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경미씨는 2019년 정씨를 비롯한 K-POP 스타들의 성범죄가 공개적으로 불거지기 전까지 검사로부터 심문을 받는 쪽은 자신이었다며 고소인이 아닌 피고인처럼 대우받았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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