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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뒤에 가려진 ‘이슬람 포비아’ - 시사IN

“너무 늦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극단주의를 멈춰라.” 3월7일 스위스에서 실시된 이른바 ‘부르카 금지 법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취리히 시내 곳곳에 붙은 포스터의 문구다. 부르카는 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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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주로 각 신문사들의 기사를 페이스북 팔로우 형태를 통해 전달받는다. 내가 팔로우 하는 신문사만 해도 대략 10개 정도가 되는 것 같은데, 정말 잘 쓰여진 기사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 특히 뉴스보도 방송국을 포함한 신문사들의 기사들을 보면 어떤 관점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투명하게 보인다. 넘쳐나는 기사들 속에서 내가 보면서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러면서도 저널리즘의 기본은 지키고 있는 기사를 보면 약간의 희열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시사인의 기사들이 내가 만약 기자라면 쓰고 싶은 글의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가 관심있는 다양한 생각거리들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블로그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담는 것을 되도록이면 피하고 여러 이슈들에 대한 최대한 다양한 신문사들의 기사들을 정리해 공유하여 사람들이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본인들만의 의견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

그러다 보니 내 스스로 좀 더 깊이 고민하고 진지한 글을 쓸 기회가 줄어드는 것 같았고, 기사들을 정리하는 것과 별개로 나에게 생각거리를 던지는 기사에 대한 내 짧은 의견을 남기려고 한다. 그 첫번재 기사가 유럽 내에서 확산되고 있는 #이슬람포비아 에 관한 기사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난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슬람권 국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비단 종교적 측면이라기 보다는 국제사회의 구조적 시선 속에서 내가 최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 내가 기회가 될 때마다 되도록이면 이슬람 문화권의 나라를 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튀니지, 이집트, 터키, 요르단 등의 아랍권 국가에서의 체류 경험은 내가 대중매체와 여론에 의해 다뤄지는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왜곡과 편견에 휩싸여 있는지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이미지는 테러와 전쟁 그리고 인권침해적 규율로 표현되지만 사실 그러한 실체를 가진 무슬림은 일부이고, 그러한 무슬림은 평화와 사랑이라는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의 신자들에게도 진정한 신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것은 인종차별의 논리와 동일한 것으로 일부의 인종의 사람들이 행하는 범죄와 일탈을 모든 인종의 특성으로 규정하고 이를 판단근거로 삼는 것과 동일하다.

"무슬림 여성을 억압하는 새로운 주체"

위 기사는 프랑스에서 부터 시작한 유럽국가들 내에 복면착용 금지법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와 이목구비만 드러내는 히잡 혹은 눈만 드러내는 부르카를 착용하는 것은 이슬람 율법에 따른 것이 맞지만 핵심은 그것을 무슬림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냐에 관한 문제이다. 유럽 내 테러의 주체가 무슬림들이라는 언론보도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공포와 혐오 그리고 히잡과 부르카가 이슬람을 대표하는 여성 인권침해적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합해져 유럽 내의 여러 국가들이 앞다퉈 복면금지법안을 도입했거나 시도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무슬림 여성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 선택의 주체가 본인들(무슬림 여성)일 때 합리적 논리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아랍권 국가에서 히잡은 여성들에게 선택사항일 뿐이다. 착용할 권리와 자유는 착용하지 않을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모든 종교 신자들이 종교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히잡착용 또한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기사의 핵심이다.

"일반화와 집단화 단절된 대화와 질문"

이 기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히잡착용 금지와 같은 법안이 오히려 히잡을 착용했을 때 사회생활이 가능한 무슬림 여성들을 억압하며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이다. 공포와 혐오는 지금까지 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통해 진행되어 왔고 그럴 듯한 명분을 앞세워 누군가에 대한 폭력을 정당해왔다. 극단주의자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런 범죄자들이 특정 집단을 대표하고 동일한 특성을 가진 이들이라는 일반화는 문제의 원인을 단순하게 만들고 그들을 억압함으로써 해결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특정 범죄에 대해 어떠한 성별, 나이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가 통계자료에서 확인되었고 본인이 그러한 집단 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하고 침해 당하는 것에 침묵할 것인가? 그것이 집단 내에 포함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함으로써 해결되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누구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딘가에서는 나도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고 어떻게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는 끊임없는 질문과 이해를 통한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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